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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 04.23
올 가을부터 민관 미술행사를 연계한 '대한민국 미술축제'가 열린다. 문화체육관광부는 22일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에서 서울, 광주, 부산 및 국내 미술관련 단체들과 함께 이같은 내용을 담은 공동선언문을 발표했다.
선언문에는 각 기관들이 긴밀하게 협력하고 각종 전시와 행사 내용, 일정을 연계해 한국 대표 미술 행사가 되도록 추진한다는 내용이 담겼다.
인사말을 통해 유인촌 문체부 장관은 "해외문화원과 관광공사, 콘텐츠진흥원 해외지사 심지어 세종학당까지 우리 해외망을 총동원해 우리 미술을 세계 시장에 홍보할 것"이라며 "키아프·프리즈에 온 외국 손님들이 광주부산 비엔날레도 같이 볼 수 있도록 여건을 조성하고 젊은 작가부터 원로들까지 국내는 물론 해외에서도 인정받을 수 있는 시장을 만들어보겠다"고 포부를 밝혔다.
이날 행사엔 박형준 부산시장, 강기정 광주시장, 김상한 서울1부시장 직무대리를 비롯한 지자체장들과 광주비엔날레, 부산비엔날레, 한국화랑협회, 프리즈 서울, 예술경영지원센터, 한국관광공사, 한국철도공사, 인천공항공사, 한국공항공사를 대표한 관계자들이 모두 참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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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 04.22
한국도자재단이 '2024 경기도자비엔날레 국제공모전' 출품작을 대상으로 1차 온라인 심사를 진행한 결과 21개국 모두 61점의 작품을 선정했다.
21일 한국도자재단에 따르면 올해 '경기도자비엔날레 국제공모전'에는 전 세계 73개국에서 작가 1097명이 참여, 모두 1505점의 작품이 출품됐다.
1차 심사에는 한국, 미주, 유럽, 아시아 등 국내외 전문가 6명이 비공개 심사위원으로 참여했다. 심사 결과 아시아 40점(7개국), 유럽 10점(9개국), 아메리카 10점(4개국), 중동 1점(1개국) 등 총 61점(21개국)이 입선작으로 선정됐다.
최종 수상작 순위는 오는 7월 2차 작품 실물 심사를 통해 결정되며, 8월 최종 결과가 공표될 예정이다.
수상작은 9월 개막하는 '2024 경기도자비엔날레' 기간 여주 경기생활도자미술관에서 전시된다.
자세한 내용은 한국도자재단 누리집(www.kocef.org) 또는 경기도자미술관 누리집(www.gmocca.org)에서 확인할 수 있다.
최문환 한국도자재단 대표이사는 "올해 국제공모전에는 전 세계 현대 도예의 젊은 동향과 세련된 미감을 보여주는 도자 예술 작품들이 대거 출품됐다. 어떤 작품이 대상의 영예를 안을 수 있을지 많은 관심 부탁드린다"라고 말했다.
한편, 2024 경기도자비엔날레는 오는 9월6일부터 10월20일까지 45일 동안 '투게더_몽테뉴의 고양이(TOGETHER_Montaigne’s Cat)'를 주제로 이천, 여주, 광주를 중심으로 경기도 곳곳에서 펼쳐진다.
◎공감언론 뉴시스 [email protec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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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 04.22
한국문화예술위원회(위원장 정병국, 이하 예술위)가 한국관 건립 30주년 특별전시 '모든 섬은 산이다 Every Island is a Mountain'를 지난 19일 공식 개막했다. 베니스비엔날레 국제미술전 기간 동안 자르디니와 아르세날레를 중심으로 본전시와 국가관 전시에 관심이 집중되는 것을 감안 했을 때, 특별전시 개막에 대한 전세계 미술인들의 관심은 이례적이다. 한층 높아진 한국미술의 위상을 실감케 한다.
개막 하루 전날이었던 18일 오후 6시 베니스 몰타기사단 수도원에서 열린 개막행사에는 런던 서펜타인 갤러리의 아트 디렉터 한스 울리히 오브리스트, 휘트니 뮤지엄 관장 스캇 로스코프트, 샤르자 아트 파운데이션의 디렉터 후어 알 카시미, 국립현대미술관 김성희 관장, 이서현 리움미술관 운영위원장을 비롯한 세계 미술계의 영향력 있는 인물들이 대거 모였다. 또한, 영국의 세계적인 조각가 안토니 곰리, 덴마크 아티스트 그룹 슈퍼플렉스, 프랑스의 대표적인 현대미술가 장 미셸 오토니엘 등도 모습을 드러냈다. 뿐만 아니라 곽훈, 강익중, 이형우, 김수자, 문경원, 전준호 등 역대 참여 작가를 비롯하여 김홍희, 김선정, 안소연, 주은지, 윤재갑, 김승덕, 이영철 등 역대 예술감독과 국내 및 해외 미술 관계자 500여명이 모여 베니스의 중심에서 한국미술의 밤을 환하게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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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 04.20
‘내셔널 갤러리 오브 아트’(National Gallery of Art)는 엄밀한 의미의 ‘국립’ 미술관은 아니다. 지금도 국가가 운영자금을 지원하지만 작품 구매와 필요비용은 펀딩을 통해 충당한다. 대부호이자 슈퍼 컬렉터로 꼽히는 미첼 레일즈가 대표직을 맡은 것은 우연이 아니다.
이쯤 되면 궁금해진다. 미국을 대표하는 내셔널 갤러리를 만든 사람은 누구일까.
내셔널 갤러리의 탄생에는 슈퍼 리치이자 컬렉터였고 미국 재무상을 11년간 지낸 앤드류 멜론(1855~1937)이 있다. 그는 앤드류 카네기, 헨리 클레이 프릭, 존. D. 로커펠러 등과 함께 20세기 초 미국 경제의 기틀을 다진 ‘경제 대통령’ 중 하나다. 카네기가 철강 산업을, 프릭이 코크스 산업을, 로커펠러가 석유 산업을 이끌었다면 멜론은 점유한 분야가 없었다. 은행업(‘Mellon National Bank’)을 아버지 대부터 운영하긴 했지만 금융 산업에 헌신했다고 보기는 어렵다. 그럼에도 당시 미국 3위 재벌로 꼽힌다.
그는 은행을 통해 될 만한 사업에 돈을 빌려줘 회사를 설립할 수 있도록 돕고 그 대가로 주식을 받는, 요즘 말로 하면 ‘엔젤 투자자’였다. 대표적인 사례가 피츠버그에 기반한 알루미늄 회사인 ‘알로카’(Aloca)와 글로벌 정유회사인 ‘걸프 오일 컴퍼니’(Gulf Oil Company)다. 이외에도 조선회사인 ‘뉴욕 쉽빌딩 코퍼레이션’(New York Shipbuilding Corporation), 위스키 브랜드인 ‘올드 오버홀트’(Old Overholt), 철도용 차량 제조사 ‘스탠다드 스틸 카 컴퍼니’(Standard Steel Car Company), 화학회사인 ‘코퍼스’(Koppers) 등 19세기 말~20세기 초 미국의 대표 회사들이 멜론의 손을 거쳤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멜론의 전기(‘An American Life, Mellon’)를 쓴 데이비드 카나딘은 “될성부른 떡잎에 투자하고, 그 결실을 나누는 방식으로 다른 사람이 성공하면 본인도 성공하도록 구조를 짰다. 이 비즈니스 방식은 내셔널 갤러리에도 똑같이 적용됐다. 자기 돈을 넣고, 컬렉션을 기부함으로서 다른 사람들의 참여를 유도했다. 본인의 컬렉션을 레버리지 삼아 내셔널 갤러리가 더 훌륭한 컬렉션을 갖추기를 바랐던 것”이라고 평한다.
美 대표 미술관, 그 시작은 인테리어?
은행을 운영할 만큼 부유한 집안의 넷째 아들인 앤드류 멜론은 미술엔 큰 관심이 없었다. 당시의 피츠버그는 번화한 뉴욕이나 트렌드를 이끌던 유럽 도시와 달리 석탄산업 비중이 큰 공업도시였다. 문화 자체를 즐기지 않은 것은 아니었는데 미술보다는 문학과 연극을 좋아했다고 한다.
이런 그가 작품을 처음 산 것은 뒤늦은 결혼 때문이었다. 멜론은 45세에 결혼했는데, 상대는 영국 기네스 맥주회사의 딸로, 불과 20살이었다. 결혼 때문에 미국으로 (그것도 깡촌으로!)이주하게 된 어린 신부를 위해 멜론은 집을 꾸밀 목적으로 컬렉션을 시작한다. 아내가 집에서라도 편안함을 느낄 수 있도록 19세기 프랑스 작가들의 작품을 주로 사들였다. 그러나 결혼이 파경으로 치닫자, 컬렉션을 안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팔아치우기까지 했다.
두번째 컬렉션도 인테리어 데코용이었다. 이번엔 딸을 위한 소비였다. 피츠버그 우드랜드에 좀더 큰 집을 마련한 멜론은 딸을 상류사회에 데뷔시키고 그곳에서 자리잡게 하기 위해 작품을 다시 사들인다. 마찬가지로 풍경화, 여성 초상화 등 자신이 즐기기 위한 용도로 샀을 뿐이다.
세번째 컬렉션은 재무상을 역임하면서 시작한다. 1921년부터 1932년까지 11년을 지냈는데, 세명의 대통령을 연속으로 보좌했다. 워런 G. 하딩, 캘빈 쿨리지, 허버트 후버 대통령이 멜론을 재무상으로 기용한 것이다. 다만 그가 재임 중이던 1929년 대공황이 터졌고, 그 여파로 1932년 사직한다. 그때부터 1년간 미국 대사직을 맡아 영국으로 건너간다. 이때 컬렉션은 워싱턴DC에 있는 자신의 펜트하우스 인테리어용이었다. 집이지만 동시에 공적 공간이기도 한 펜트하우스를 꾸미기 위한 선택은 이전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다만 이 시기 영국 출신 딜러인 조셉 두빈과 본격적인 관계를 맺게 된다. 둘의 첫 만남은 1913년 뉴욕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멜론의 슈퍼 컬렉터 자질을 간파한 두빈이 그를 스토킹하다시피 쫓아다니며 막강한 세일즈를 펼친다. 노련한 사업가인 멜론은 두빈의 제안을 번번이 거절했지만, 그렇다고 쳐내지도 않았다. ‘밀당’ 끝에 두빈은 토마스 로렌스 경의 초상화 ‘레이디 템플턴과 아이’를 25만 달러에 판매했다. 큰 거래가 성사된 것이다.
앤드류 멜론, 역사에 남을 미술관을 만들다
멜론의 마지막 컬렉션 시기는 1930년 이후로 꼽힌다. 그보다 앞선 1926~1928년 사이 그는 건축에 관심을 기울인다. 정확하게는 워싱턴의 재개발과 도시 미화였다. ‘랑팡 플랜’은 오래 전에 미완으로 끝났고, ‘맥밀란 플랜’도 힘을 일어가던 때였다. 멜론의 표현에 따르면 백악관과 의사당 사이는 “주유소, 여관, 중국 세탁소”로 가득했다. 심지어 연방 행정부들이 사무실을 빌리느라 매년 수십만 달러의 세금을 낭비했다.
연방빌딩의 필요성을 잘 알고 있던 멜론은 연방 행정부들이 모여 있는, 이른바 ‘페더럴 트라이앵글’ 구조를 짜는 프로젝트에 착수한다. 이때 프로젝트 안에는 국립미술관인 ‘내셔널 갤러리 오브 아트’도 포함되어 있었다.
두빈은 자신이 멜론에게 내셔널 갤러리의 필요성에 대해서 가장 먼저 일깨웠다고 주장하고(1923), 아들인 폴 멜론은 아버지가 1927년에 들어서야 내셔널 갤러리를 짓겠다고 결심했다고 설명한다. 멜론의 1928년 9월3일 일기에는 “딸이 전화를 걸어 정부에 미술관을 줄 생각이냐고 물었다”고 적혀있다. 시기는 명확치 않지만 멜론은 오래 전부터 국립미술관 건립을 고민했던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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