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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eople화폭에 담긴 '해방공간'의 혼란, 그리고 희망

2017.08.16

[뉴스1] 김아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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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쾌대_군상1-해방고지_1948_캔버스에 유채_181x222.5cm_개인소장 (국립현대미술관 제공) © News1

광복 72주년…'월북화가' 이쾌대 그림으로 다시 보는 해방의 순간

상기된 표정의 두 여인이 그림 왼쪽에서 달려나오고 있다. 8·15 광복의 기쁜 소식을 전하는 여인들이리라. 오른쪽에는 이 소식을 전해 듣는 사람들의 모습이 그려져 있다.

환희로 가득한 순간은 이내 화면 아래쪽 처참하게 죽은 사람들의 시체와, 뒤엉켜 싸우는 사람들의 모습에서 혼란의 순간으로 전이된다. 월북화가 이쾌대(1913~1965)가 1948년 4월 '제2회 조선미술문화협회전람회'에 출품한 이 작품은 그의 '군상' 시리즈 대표작인 '군상1-해방고지'다.

가로 2m가 넘는 큰 캔버스에 30명에 가까운 사람들이 그려진 이 그림은 당시로서는 보기 드문 대작이었다. 이쾌대는 해방공간의 혼란 속에서도 이를 헤쳐나가려는 사람들의 의지, 그리고 민족의 미래에 대한 희망을 그림을 통해 이야기했다.

8·15 광복 72주년을 맞는 15일, 해방공간의 혼란과 희망을 담은 이쾌대의 걸작이 다시금 눈길을 끈다. 이쾌대의 그림은 일제강점기, 해방기, 그리고 한국전쟁으로 이어지는 비극의 한국 근현대사와 맥을 같이 했다. 암울한 시대에 민족의 역사와 전통을 주제로 독자적인 예술세계를 확립한 그는 해방 직후 좌익과 우익이 대립하던 격동기에 이같은 대작을 쏟아냈다.

이쾌대_군상4_1948 추정_캔버스에 유채_177x216cm_개인소장 (국립현대미술관 제공) © News1

이쾌대는 백남준(1932~2006)과 함께 20세기 한국을 대표하는 미술가지만 저평가된 미술가로도 꼽힌다. 그가 그린 '두루마기 입은 자화상'(1940년대)은 한국의 대표적인 걸작으로 대중의 사랑을 받아왔다.

그러나 월북화가라는 탓에 이름조차 거론되는 것이 금기시되다 1988년 해금이 된 후에야 서서히 이름이 알려지기 시작했다. 오랜 세월동안 존재조차 가려져 왔던 화가가 다시금 주목받는 이유에 대해 미술계에서는 △완벽에 가깝게 인체를 그려내는 뛰어난 능력 △많은 이야기를 담고 있는 듯한 인물들의 분위기와 표정 △역사와 시대가 녹아있는 작품의 주제 등을 꼽는다.

1913년 경북 칠곡 부잣집 아들로 태어난 이쾌대는 서울의 휘문고보를 졸업한 뒤 일본으로 건너가 제국미술학교에서 서양화를 배웠다. 학창시절에는 인물화에 관심을 보였으며, 일본의 유명 전람회인 '니카텐'(二科展)에서 '운명'(1938)으로 입선하면서 두각을 나타냈다. 귀국 후에는 이중섭, 최재덕 등 일본 유학출신 화가들과 함께 '신미술가협회'를 결성하고 한국적 감성이 녹아 있는 세련된 서양화들을 선보였다.

해방 후에는 해방의 감격과 역사적 사건을 주제로 '군상-해방고지'(1948)와 같은 대작을 발표했다. 새로운 국가건설에 있어서 예술가의 역할과 사명을 고민하며 창작의욕을 불태우는 한편, 홍익대학교 강사, 대한민국미술전람회(국전)의 추천화가 등으로 왕성하게 활동했다.

이쾌대_군상4 부분 (국립현대미술관 제공) © News1

이쾌대_군상4 부분 (국립현대미술관 제공) © News1

그러나 한국전쟁 발발 당시 병환 중인 노모와 만삭인 부인 때문에 미처 피난을 가지 못하는 바람에 서울에 남았던 그는 서울을 점령한 북한군의 강요로 공산 치하에서 조선미술동맹에 가입해 김일성, 스탈린의 초상화를 그리는 등 북한군의 선전미술 제작에 강제 부역했다. 국군에 의해 서울이 탈환된 후에는 부산의 국군 포로수용소에 수감됐다가 1953년 결국 월북했다.

그의 월북 이유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하다. 1948년 초 이미 월북을 감행한 친형 이여성 때문에 남한 사회에 돌아가는 것을 불안하게 느꼈을 것이라고 보는 쪽도 있고, 좌우익 간 갈등이 심했던 포로수용소에서 생존의 위협을 느꼈기 때문이라고 보는 쪽도 있다. 어쨌든 이쾌대는 1953년 남북한 포로교환 때 북한을 택했다.

미술계에서는 이쾌대를 일제 식민지시기 우리나라의 전통문화에 어울리는 한국적 서양화를 모색하고, 해방 후에는 새로운 민족 미술이 나아갈 방향을 제시하려 했던 화가로 평가한다. 진지한 탐구정신과 뜨거운 열정으로 당시 화단을 이끌었고, 탁월한 그림 실력과 독자적인 주제의식으로 한국 근대 미술사에 뚜렷한 자취를 남겼다는 이유다.

월북 작가라는 이유로 오랜 시간 동안 그의 이름을 언급하는 것조차 금지됐지만, 세월이 흐르면서 이쾌대에 대한 평가는 조금씩 변화의 조짐을 보였다. 1988년 월북작가 해금 조치에 이어 1991년 신세계미술관에서 '월북작가 이쾌대전'이 열리면서 점차 그의 이름이 대중에 알려지기 시작했다.

이쾌대가 한국 20세기 대표 미술가로 재조명받은 건 2015년이다. 광복 70주년, 이쾌대 사망 50주기를 기념해 국립현대미술관이 마련한 '거장 이쾌대, 해방의 대서사'전에서 그동안 산발적으로 전시돼 왔던 대표작들이 한자리에 망라된 바 있다.

'군상1-해방고지' 앞에 서있는 이쾌대. (국립현대미술관 제공) © News1

ami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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