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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eople[이색 문화人-⑲] "닭 그림에 사악함 물리쳐주기 바라는 마음 담았어요"

2017.01.02

[뉴시스] 박현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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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뉴시스】이상원 화백

■ 이상원 화백 2년간 작업 '닭'시리즈 '촉야'공개
'영화 간판쟁이'→'초상화가'로 안중근 영정 제작
51세 첫 개인전…국내 '극사실주의 화가'로 우뚝

"2017년 정유년 닭의 해를 맞아 닭을 그린 그림을 통해 건강하고 활기찬 기운을 나누고자 합니다."

이상원 화백(81)이 지난 2년간 그려온 '닭'시리즈를 공개했다. 강원도 춘천 사북면 화악지암길 산속에 있는 이상원 미술관에서 ‘촉야(燭夜)'전에 39점을 선보였다.

【서울=뉴시스】이상원 대자연_닭_03 한지위에 먹과 유화물감

100호 크기 대형 화면에 배경이 생략된 채 오로지 '닭'만이 화면을 차지해 기운생동함을 전한다. ‘밤을 밝히다’, ‘어둠을 밝히다’는 의미의 '촉야'라는 전시 타이틀은 '새벽의 여명을 알리는 닭의 울음소리'를 뜻하며 닭을 일컫는 별칭이기도 하다.

이 화백은 "옛날엔 밤새워 술마시며 놀다가도 닭 울음이 들리면 빨리 이불을 덮고 자야했다"며 닭과 함께 '태평'했던 시대를 회고했다. "어휴, 그때는 닭이 한번 울기 시작하면 계속 시끄럽게 울어대서 잠들수가 없었고, 새벽에 꼬끼오~하고 닭울음 소리가 들리가 벌떡 일어나야 했어요. 닭이 알람 시계였으니까요."

정유년, '닭의 시대'가 열리지만, 현재 '닭의 굴욕시대'다. 전염병 같은 조류인플루엔자(AI)로 살처분 되는 닭들로 '꼬끼오~' 소리는 언강생심인 때다. 기계음으로, 그림으로만 닭을 만나는 시대지만 이상원 화백에게 닭은 여전히 아침의 시작이자, 밝고 희망찬 메시지다.

【서울=뉴시스】이상원 대자연_닭_10 한지위에 먹과 유화물감

그는 “옛날 시골에선 옆집이 닭을 키우지 않으면 무시했을 정도로 닭은 가족이나 다름없었다"면서 "요새는 닭을 키워 잡아먹는 데에만 쓰이고 있어 안타깝다”고 했다.

닭이 '후라이드반, 양념반'으로 나눠 먹거리로 현대인의 안주로 변신했지만, 이 화백에게 닭은 새벽과 희망의 상징이다. 물론 현대사회에서 닭의 울음소리와 아침의 시작이 더 이상 동일하지 않은 문화가 되었지만, 닭과 함께 새벽을 열고 그 시대를 살아냈던 노 화백에게 닭은 "새벽을 일깨우는, 시간 관념 철저한 동물이자, 길조다."

그래서 이번 전시는 사실감에 더욱 치중했다. 이 화백은 "생동감 있는 닭의 모습을 표현하려고 배경 등을 다 생략했다"고 했다.

사람들과 일상을 함께 닭은 많은 화가들이 소재로 다루어왔다. 조선후기에는 변상벽에 의해 그려진 어미닭의 모습을 보고 정약용이 시를 짓기도 했고, 화조도로 장승업, 파격과 자유로움의 이미지를 구축한 황창배 화백의 독창적이면서도 유머러스한 닭 그림 등이 유명하다.

【서울=뉴시스】이상원미술관 전경

이 화백이 그린 닭은 작은 동물이 아니다. 시골에서 볼 수 있는 흔한 닭을 소재로 삼아 흰 닭, 검은 토종닭, 갈색과 붉은 빛이 도는 닭이 날개를 펄럭이기도 하고 털 매무새를 벼리고 꼿꼿이 서있기도 하다.

마치 독수리 같은 기운을 전한다. 미묘한 수묵의 표현이 쾌감을 전달하는 날카로운 발톱과 작지만 매서운 눈동자는 닭의 커다란 깃털에 감싸인 몸통 전체를 지배하는 모양새다. 100호와 50호 큰 화폭에 그려진 닭은 위풍당당하고 두려움을 모르는 허세가 느껴지기도 한다.

"닭의 눈을 그리기가 가장 어려웠다"는 그는 "지난 2년간 여러 방법을 시도했다가 지금의 표현법을 찾아냈다"고 했다. "마치 그림 속 용에 눈을 그리니까 용이 승천했다는 고사성어 '화룡정점'(畵龍點睛)처럼 닭 그림들도 눈을 통해 완성됐다. '화계정점'(畵鷄點睛)인 셈"이라는 설명이다.

2012년 처음 닭 그림을 시작하던 때와는 확연히 달라졌다. 초기엔 깃털을 포함한 몸통 전체를 충실히 채색하고 표현한 반면 이번에 전시된 작품은 단순하면서도 담백하고 대범해졌다. 날개 일부, 더 나아가 몸통의 일부도 여백으로 표현됐고 한지와 먹, 유화물감의 믹스매치 기법과 거대함으로 초현실적인 분위기도 전한다.

【서울=뉴시스】이상원 대자연_닭,한지위에 먹과 유화물감

"특히 사실주의 기법에 기초해 한지에 먹과 유화물감을 섞어 그렸는데, 나중에 그린 작품일수록 수묵화와 비슷해졌다"고 했다. "아무래도 내가 자연을 닮아가는 모양"이라며 껄껄 웃었다.

2000년에 고향인 춘천으로 작업실을 옮기고 나서 점점 '자연인'이 되어갔다. 호박, 순무, 소, 닭 등 자연과 가까운 소재를 화폭에 다루며 '대자연'이라는 연작으로 작업을 하고 있다. 전통 수묵화의 표현방식에 가까워지면서도 여전히 유화물감으로 그려내는 부분의 강렬함은 지속되고 있다.

한지위에 수묵의 사용과 여백의 운용이 거창하지 않은 평범한 대상을 만나 담백함을 유지한다. 그러면서도 이상원 화백이 가지고 있는 특유의 기질인 날카롭고 공격적인 정서가 있다.

국내 극실주의 화가로 꼽히는 이화백이 화가가 된 인생은 드라마틱하다. 춘천에서 한국전쟁을 겪은 직후 화가가 되겠다는 꿈을 안고 서울로 무작정 상경했다. 문제는 생계였다. 그림을 그리기위해 찾아간 곳이 극장이었고, 개봉영화 그림을 그리는 '영화 간판쟁이'가 됐다. 극장가 활황으로 호시절도 있었다. 하지만 꿈은 화가였다. 상업 초상화에 도전했고, 1970년 안중근 의사 기념관 설립시 안중근 의사 공인 영정을 그리는 영광을 안았다. 이후 꿈을 향한 열망의 끈을 더욱 붙잡았다. 불혹의 나이, 70년대 후반부터 모든 상업미술 활동을 멈추고 순수미술을 시작했다.

【서울=뉴시스】이상원 미술관 '촉야' 전시 전경.

정규교육을 받지 않은 그가 미술인들과 겨룰수 있는 것은 쉴새없는 그리기였다. 수많은 스케치 여행을 하면서 현장에서 보고 그리며 '진경산수'를 체득하며 원하는 소재를 얻었다. 먹과 유화물감으로 두꺼운 장지 위에 염색하듯 세세히 묘사하는 '이상원 만의 스타일'을 만들었다. 은둔 칩거하며 그림에만 몰두 1986년 서울갤러리에서 첫 개인전을 열었다. 그의 나이 51세였고, 전시는 단박에 화제가 되며 '극사실주의 대가'의 대열에 올라섰다.

국내 생존작가로는 최초로 1999년 국립러시안뮤지움(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전시를 개최한 'K-아트'의 원조이기도 하다. 이후 해외에서 러브콜로 연해주주립미술관(블라디보스톡,1998), 중국미술관(북경,1998), 세인트 살페트리에 성당(프랑스,1999), 상하이미술관(상하이,2001), 트레차코프미술관(모스크바,2005) 등 해외 미술관에서 초대받아 개인전을 열었다.

2000년 고향인 춘천으로 작업실을 옮겨 현재까지 작업에만 몰두, 고행같은 작업을 하는 그를 위해 아들은 그의 꿈과 희망을 담은 '이상원 미술관'을 2014년 개관했다. 이상원 화백의 작품 2000여점을 상시 볼수 있게 전시하고, 연 3회 기획전, 그룹전을 펼치고 있다. 춘천 화악산 계곡에 위치한 '자연 속의 미술관'으로 '문화와 휴양'이 접목되어 강원도의 대표 미술관으로 자리매김했다.

'영화간판쟁'이에서 국내에서 손꼽히는 '한국적 사실주의 화풍'을 이룩한 화가로 성공했지만 팔순의 화가는 붓을 놓지 않고 있다. 쉼없이 노력하는 그는 노동의 진정한 가치를 그림을 통해 증명한다.

"새해 정유년에는 어설프고 어리석은 듯 하지만 때로는 용맹한 모습을 보이고 닭의 기운이 많은 사람들에게 스몄으면 합니다. 깊은 밤을 열어 만물이 깨어날 것을 요청하는 소리, 사악한 것을 물리쳐주기를 바라는 마음, 자자손손 평안하고 풍요롭기를 기원하는 마음들, 무엇보다 평범하고 보편적인 대상 안에 알맹이처럼 자리 잡은 굳세고 강인한 생명력…. 닭 그림을 그리면서 제가 음미하고 마음에 담아온 생각이 그림을 통해 전달되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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