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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eople[이색 문화人-①]모델·가수·배우에서 화가로 이혜영의 '힐링‘

2016.09.05

[뉴시스] 박현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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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세 시대, 한 가지 직업만으로 사는 세상은 끝났다. 융합의 시대, 직업의 경계도 사라졌다. '고생이 힘든 것이 아니라 꿈이 없어서 힘든 것'이라는 말도 있다. '문화로 행복한 세상'을 위해 1막, 2막, 3막을 열고 인생을 가꾸는 '행복한 사람', '행복을 주는 사람'을 매주 소개 한다.<편집자주>■

2012년, 아버지는 위암 투병중이었다. 위 절제수술을 하고 병원에 누운 아버지를 보니 더욱 죄스러웠다. 이혼하고 세상과 담을 쌓고 지낸 딸을 보며 고통스러워했던 아버지였다. 불행은 겹쳐왔다. 12년간 함께 했던 반려견 '도로시'도 세상을 떠났다.

슬픔과 절망속에서 붓을 들었다. 젊은 시절 멋쟁이로 소문났던 아버지를 화폭에 불렀다. 중절모와 보타이를 한 신사. 화면 중앙에 크게 자리잡은 아버지는 절제된 위를 꽉 움켜잡았다. 옆에는 도로시가 지켜앉아있고, 커다란 '칼라' 꽃이 아버지를 보필하 듯 서있다. 딸은 강아지 도로시를 통해 '아버지, 걱정하지마, 내가 지켜줄게'하는 간절함을 담았다.

모델에서 가수, 배우에서 화가로 완벽 변신한 이혜영(45)이다. 지난해 첫 개인전을 연데 이어 지난 1일 두번째 개인전을 열며 '화가'로 '제 2인생'을 펼치고 있다.

2일 개막한 전시에는 설치미술까지 선보여 통의동 진화랑 입구부터 거대하고 화려하다. 전시장에서 만난 이혜영은 '뱀파이어 미모'를 자랑했다. 가늘고 쭉 뻗은 '백만불짜리 각선미'는 여전했고, 통통튀는 발랄함으로 언뜻 20대 같아보이기도 했다.

"다시 좋아해주니 제 마음도 퍼줬어요. 진심으로 퍼주니까 관객과 팬들이 같이 교감한 것 같아요."

전시장에 선보인 그림은 '감성 폭발'이다. 꾸밈없는 솔직함으로 무장된 그림은 보는 이를 무장해제시킨다. 내면의 감정을 분출시키고 마음을 흔든다. '좀 그리는데~' 라는 생각이 절로 든다.

"이혜영과 3개월간 작업실에서 동거동락 하며 전시를 준비했다"는 진화랑 신민 큐레이터는 "상상력이 탁월하다"고 짚었다. "정통 아티스트들은 어떤 개념을 설정해서 그것을 특별하게 구현하는 작업을 하는 경우가 많아 유쾌하게 상상력을 발휘한다는 느낌을 받기가 어려웠는데, 이 작가는 밑도 끝도 없이 그림마다 어떤 스토리를 만들어 낸다는 것이 새삼 참 재미있었다"고 했다.

【서울=뉴시스】박주성 기자 = 두 번째 개인전 ‘뮤즈 오브 더 윈드(Muse of the Wind)'을 여는 배우 이혜영이 31일 오전 서울 통의동 진화랑에서 뉴시스와 인터뷰 전 포즈를 취하고 있다. 2016.09.04. [email protected] 16-09-03

지난해 첫 개인전을 열때 또 한명의 '연예인 화가'쯤으로 여겼다. 올해는 '조영남 대작'사건으로 '연예인 화가'들을 바라보는 시선이 더 삐딱해졌다. 이런 상황에서 이혜영의 두번째 개인전 소식은 의외였다.

특히 둘째가라면 서러울 패셔니스타의 화려함은 미술동네에서 득보다 실이다. 유명세를 빙자한 '그림 놀이'쯤으로 치부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혜영은 천진무구함을 내뿜었다. "조영남 대작은 뉴스로 봤는데, 휩쓸리지 말자고 생각했어요."

"저는 '심각한 화가'가 아니거든요. 칩거해서 그림만 그려서인지 솔직히 미술시장을 잘 몰라요. 미술에 아는 사람도 없고요. 하지만 분명한 건 전 '대중적인 작가'가 되고 싶다는 생각입니다. 큰 돈 들여서 설치작품을 선보이는 것도 사람들이 많이 와서 즐겁고 재미있게 보다 갔으면 좋겠다는 바람이에요."

◇'상처와 고통들' 그림으로 치유

"지난 5년간 그린 그림이에요. '상처와 고통들이 나에게 준 선물'이죠. 이 말은 첫 개인전 타이틀로 사용했어요."

첫 개인전 그림은 '프리다 칼로'풍이다. 2012년 붓을 들면서 그녀를 오마주했다. 고통속에 살다간 화가 '프리다 칼로'삶과 동일시했고, 그림을 따라 그렸다.

【서울=뉴시스】이혜영 자화상. '상처와 고통의 시간들이 나에게 준 선물' 2015. 16-09-04

"학원을 다녔냐, 누가 도와줬냐고 묻지만, 진심 저 혼자 그리기 시작했어요. 아버지를 그리고 도로시를 그리면서 마음의 치유가 됐어요. 하고 싶은 말들을 그림으로 그렸다고나 할까요. 전시하려고 보니까 수백점이 넘더라고요."

2015년 1월 그린 '자화상'을 그리면서 '이혜영'화풍이 생겼다. 붓을 꼭 쥔 여자의 찢어진 가슴에서 나비가 날아오른다. 그림속 여자는 가시덤블에 묶여 피흘려 있는데도 얼굴은 세상 부럽지 않은 행복한 얼굴을 하고 있다. 그렇게 따라하던 '프리다칼로풍'도 이젠 희미해졌다.

"스스로 상처가 치유되고 있음을 깨닫고 그린 그림이에요. '네가 겪은 상처와 고통들이 너에게 영감을 주었고 그림을 그릴 수 있게 해주었잖아. 너는 이제 치유가 되었어, 그러니 더 이상 슬픔, 고통, 괴로움을 그릴 필요가 없어'라고 제 자신에게 말하는 그림이에요. 그래서 제목을 '상처와 고통들이 나에게 준 선물'이라고 붙였죠."

◇어떻게 화가가 됐을까.

연예인으로 화려하게 살다 이혼과 함께 수면으로 가라 앉았던 이혜영이다. 다시 '이름'이 불리기 시작한건 2011년 재혼하면서다. 금융계의 재력가와 하와이에서 결혼한다는 소식이 잠깐 인터넷 포털을 장식했다. 가끔 패션쇼나 신상품 런칭쇼에 모습을 비추기는 했지만, 방송화면에선 사라졌었다.

그녀를 구한건 'SNS'다. 모바일 시대가 되면서 '이미지 쇼'는 더 극렬해졌다. 심심풀이로 올리기 시작한 사진은 예상밖이었다. "나도 저렇게 예쁘고 곱게 나이들고 싶다" "여자가 봐도 멋진 여자'라며 '좋아요' 엄지척이 수천, 수만개씩 세워졌다.

인스타그램에서 20만명을 거느린 셀럽(celeb)으로 부활했다. 집안 인테리어와 패션 스타일은 기본, 작업복을 입고 그림을 그리는 장면도 보여줬다.

【서울=뉴시스】이혜영은 인스타그램에 그림을 그리는 모습등 자신의 일상을 모두 공개하며 다시 사람들과 소통했다. 16-09-04

그림은 슬픔을 이겨내는 해독제였다. 웅크린 그녀를 세상밖으로 나오게 한 일등공신이다. 패셔니스타에서 '그림쟁이'로 변신해갔다. 인스타그램은 공개 일기장이 됐고, 한 점 두 점 올리던 그림은 중독성을 보였다. '나의 자궁에게'라는 그림은 화제였다. 이혜영의 얼굴로 그려진 자궁은 건강해보이지 않았다. 왼쪽 난소는 터져있고, 오른쪽 나팔관은 묶여서 정자가 드나들기 어려워 보인다. 재혼 후 3년째 아이가 없는 상황을 은근히 알려준 그림이다. 이혜영은 '너무 늦어버렸어. 너무 늦어버렸대. 미안해... 하지만, 웃자!'고 멘트를 달아 팔로워들을 즐겁게 했고, 그림 실력은 나날이 늘어갔다.

'전시회를 열었으면 좋겠다'는 댓글이 많아졌다. 말은 씨가 됐다. SNS통해 갤러리들의 섭외가 이어졌고, 급기야 개인전도 진행됐다. 2015년 10월 3일, 평창동 가나아트센터에서 운영하는 갤러리 언타이틀드에서 대규모 전시를 펼쳤다. 인스타그램에서 사진으로 보던 '상처와 고통들이 나에게 준 선물'을 쏟아냈고, 수천 명의 팔로워들이 진짜 그림을 만나 교감하고 소통했다.

전시장에 나온 그림은 내공이 만만치 않다. 리듬감 넘치는 붓질과, 색감의 조화의 분방함 속에 슬픔과 고통 행복이 함께 서려있다. '색을 가지고 논다'는 느낌이다. 3~5개의 색 조합으로 두터운 마티에르속 색의 레이어들을 읽는 재미도 있다. 비극을 희극으로 풀어내는 찬란한 슬픔같은 유머가 녹아있다. 독학 덕분일까 성격탓일까. 두려움 없는 붓질과 색의 조합, 그리고 자신의 솔직한 이야기를 가감없이 꺼내놓아 호소력이 있다.

신민 큐레이터는 "그림 그릴때 보니 완전히 자유로운 상태가 되는 걸 행복해 하더라"며 "솔직한 성격만큼 가식이 없는 그림이어서 대중들이 환호하는 것 같다"고 분석했다.

◇철없던 소녀, 여자에서 엄마로…"한심해보이기 싫었다"

"아버지 때문에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지만, 실은 딸 때문이기도 했어요."

언니 오빠와 열살 터울이나 나는 늦둥이 막내로 살았다. 인천에서 경복궁으로 놀러간 어느 날, 일명 '길거리 캐스팅'됐다. 고교 시절부터 하이틴 잡지 표지모델로 일찍감치 연예계에 들어와 세상 무서운줄 모르고 살았다. 18세부터 집에서 독립해 모델에서 가수로도 데뷔했다. 1993년 여자 2인조 '코코'로 인기를 휩쓸었다. 이후 배우로도 안방극장에 눈도장을 찍었다. 한창 잘나가다 추락한 것은 결혼을 하면서다. 친구였던 가수 이상민과의 신혼은 1년2개월만에 끝났다. 불행의 시작이었다.

【서울=뉴시스】박주성 기자 = 두 번째 개인전 ‘뮤즈 오브 더 윈드(Muse of the Wind)'을 여는 배우 이혜영이 31일 오전 서울 통의동 진화랑에서 뉴시스와 인터뷰 전 포즈를 취하고 있다. 2016.09.04. [email protected] 16-09-03

"내가 행복하려고 이혼했는데 세상이 나를 향해 돌팔매를 하고 손가락질 했어요. 당시만 해도 연예인 이혼은 방송 출연은 커녕, 세상 이야깃거리로 날마다 시끄러웠고, 죄인 아닌 죄인 취급을 받았어요."

당시에도 패셔니스타로 인기 절정의 팬 관리하던'싸이월드'도 폐쇄했고, 세상과 담을 쌓았다. 마음을 걸어 잠그고 웅크리고 있을때 지인들이 소개팅을 연결했다. 7번째 만남에서 지금의 남편을 만났다. 또 딸도 생겼다. 11살짜리 딸이 물었다. "친구들이 그러는데, 엄마는 왜 TV에 안나와?"

"아무것도 안하는 한심한 엄마같았아요. 정말 힘든 시기였는데, 무슨 영문이었는지 그림을 그리기 시작한거죠. 이젤을 사고, 아크릴물감을 사서 거실에 놓고 계속 그림을 그렸어요. 한 8개월쯤 지나니까 거실에 그림이 꽉 차더라고요. "

느닷없이 엄마가 됐지만 '딸바보'다. 이젠 고등학생인 딸은 '엄마처럼 되겠다'며 열렬한 팬이라고 한다. "딸이 그러더라고요. '그림그리기 시작할 때 어이가 없었는데 나중엔 존경스럽다'고 했다"면서 "공부는 안시켜도 봉사활동은 꼭 시킨다. 잘 키워야겠다"며 활짝 웃었다.

"눈만 뜨면 그림 그릴 생각에 신이 난다"는 그녀지만, 처음에는 그림 독학이 쉽지 않았다. 이렇게 하는 게 맞나, 자격지심도 생겼다. 긴가 민가 생각을 털어놓으면 주변에선 학원을 다녀라 다니지 말라는 말들이 잇따랐다. 그 와중에도 그림은 계속 그렸다. 그리는 과정에서 실패와 성공도 이어졌다. 혼자 연구하고 혼자 그리면서, 실패해도 좋았다. "이건 무슨 사인일 거야"라며 망친 의미를 뒀다. 세상을 원망했던 마음이 풀렸다. 혼자있어도 긍정적이 됐다. 나만의 시간, 누구의 방해도 받을 일 없는 그림 그리기는 10시간씩도 틀어박히게 했다. 모두 남편과 딸, 부부리와 초코, 가족 풍경이다. 상상력은 꼬리를 물고 이어진다." 스케치도 안하고 바로 그려요. 즉흥적이죠."

◇"화가가 목적이 아니다. 하고 싶은 것을 하는 것"

그림을 그리게 된 건 "미술에 조예가 깊은 남편 때문"이라고도 했고, "바람처럼 이끌려왔다"고 했다.

【서울=뉴시스】박주성 기자 = 두 번째 개인전 ‘뮤즈 오브 더 윈드(Muse of the Wind)'을 여는 배우 이혜영이 31일 오전 서울 통의동 진화랑에서 뉴시스와 인터뷰 전 포즈를 취하고 있다. 2016.09.04. [email protected] 16-09-03

"남편을 만나 40여년만에 처음으로 미술관에 갔었어요. 연예인 시절엔 너무 바빠 문화생활은 엄두도 못냈었어요. 하지만 모델 가수 배우로 일했던 게 감각의 촉수를 예민하게 한 것 같아요. 무대,방송자체가 예술이잖아요.색감 구도 조화 그런 센스가 나도 모르게 배워진거죠"

하지만 "꿈을 이룬 것은 아니다"라고 했다. "화가가 되겠다는 목적이 있어서 시작한게 아니라, 하고 싶은 것을 하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원래 미술에 재주가 있었다. 미대에 가려는 딸을 엄마는 '돈 못벌고 고생한다'고 반대했다. 초등학교때부터 미술 시간은 그녀 독차지였다. 그림을 그리고 있는 그녀의 머리를 '쓰담 쓰담' 해주던 선생님의 손길을 아직도 느껴진다. 친구들은 소질을 보이는 그녀에게 숙제를 넘겼고, 소녀 혜영은 어떤 때는 300장씩 난을 쳐주기도 했다고 한다. 정식으로 미술을 배우진 않았지만, 늘 미술 속에 있었다. 화가로 데뷔하기전 의류업체와 함께 패션디자이너로도 활동하며 의상 일러스트를 슥슥 그려냈고, 지금도 의류업체의 러브콜이 이어지고 있다.

갤러리에서 '작가님~'하고 부르면 '누굴 부르지?'하고 아직도 '화가'라는게 어색하다고 하면서도 "과거 다리 보험(2001년 국내 연예인 최초 12억)을 들었는데, 이제 화가로서 손 보험을 들어야 하나"라며 너스레를 떨 정도로 여유가 생겼다.

즐거움은 고통의 씨앗이다. 이혜영은 "행복은 고통없이 존재할 수 없다"는 것과 "내가, 내 마음이 중요하다는 것을 알았다"고 했다. '아모르 파티(amor fati)."남의 시선, 남의 이야기는 중요하지 않아요. '마음의 비밀'을 열어준 그림은 그래서 제게 전부에요."

'고통의 시간들이 준 선물', 그림으로 치유가 된 그녀는 생각도 선명해졌다. 타인의 삶에 영향을 끼치는 힘도 안다. 감동의 매개체가 되길 원한다. "더 유명해지고 싶어요. 그래야 더 많은 사람들을 도와줄수 있잖아요."

40대 후반, 화가로 변신해 눈부시게 빛이 나고 있는 이혜영이 보여주는 건 '마음의 글자'다. 사랑받아본 사람이 사랑할줄도 안다. "팬들과 관객들에게 사랑받고 있어 행복해요. 멀리서도 오시는 팬 분들에게 날마다 울컥 감동해요. 제 그림을 감상해주시는 것만으로도 이렇게 행복 할 수가 없어요. 제가 잘났다고 하는 전시가 아니에요. 그저 저를 보면서, '나도 하고 싶은 일이 있는 데 시작해볼까?' 이런 마음이 들었으면 해요. 저는 계속 그림을 그릴 것에요. 앞으로 또 어떤 그림을 그려낼지 기대해도 좋아요. 호호호~" 전시는 30일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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