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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시소식The Depth of Cycle 주기의 깊이

2018.05.11

Writer : new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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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기철展 / KIMKICHUL / 金起徹 / sound.sculpture

 

2018_0322 ▶ 2018_0519 / 일,월요일 휴관​ 

 

​김기철_초속 5cm라 들었다_혼합재료_75×65×40cm_2018

● 위 이미지를 클릭하면 네오룩 아카이브 Vol.20141102c | 김기철展으로 갑니다.

 

 

 

 

초대일시 / 2018_0322_목요일_05:00pm

 

작가와의 대화 / 2018_0425_수요일_07:00pm

 

관람시간 / 10:00am~06:00pm / 수요일_10:00am~09:00pm / 일,월요일 휴관

 

 

 

OCI 미술관

OCI Museum Of Art

서울 종로구 우정국로 45-14(수송동 46-15번지)

Tel. +82.(0)2.734.0440

www.ocimuseum.org

 

 

 

 

누구나 한 번쯤 무심결에 바깥의 빗소리에 귀 기울여 본 적이 있을 것이다. 사랑에 빠진 두 연인의 보금자리 지붕 위로 떨어지던 빗소리가 사월에는 미 정도였다가 칠월에는 솔까지 올라갔다는 어느 소설의 구절처럼, 소리에는 물리적 존재를 넘어 사람의 마음을 울리는 부분이 있다. 아니, 어쩌면 '부분'이 아니라, 그것이 우리가 느낄 수 있는 소리의 전부인지도 모르겠다. 같은 사람의 목소리일지라도 그의 자장가는 감미롭고, 잔소리는 유독 시끄러운 것처럼. ● 김기철은 소리를 조각한다. 눈에 보이지도, 손에 잡히지도 않는데, 그에게 소리란 꽤 훌륭한 조각 재료란다. 파고 또 파도 알면 알수록 어렵고, 할 말이 여간 많은 게 아니다. 그러다 보니 벌써 이십여 년째, 소리를 보겠다고 시작한 일이 이제는 '소리란 무엇인가?'라는 더 큰 질문으로 옮겨왔다. ● 음량(音量), 음고(音高), 음색(音色), ... 소리를 다루는 사이 그의 작업에는 자연스레 소리의 공간도, 깊이도, 빛깔도 담겼다. 그런 그의 관심이 최근 머무르는 곳은 시간, 진동의 주기이다. 소리의 주기에서 생의 주기로, 역사의 주기로, 자연의 주기로, 유연하게 곡선을 그리며 흐르는 무언가의, 어느 것일지라도 지니는 저마다의 움직임이다. 언제나처럼 출발은 마음에서부터. 마음을 움직이는 소리는 퍼져나가는 것이고, 떠나가다가도 되돌아오는 것이고, 제각각 다르지만, 또 결국에는 모두 같은 것이기도 하다는, 선문답 같은 사색을 무심한 듯 담담하게 작품에 담았다. 호들갑스럽게 과장하지도, 부러 예뻐 보이려 하지도 않고, 그저 있는 그대로이고자 하는 모습으로. ● 전시장을 서성이며 그의 소리를 보고 있노라면, 어느샌가 마주하는 것은 각자의 기억이다. 언젠가 걸었던 벚꽃 흩날리던 거리를, 어느 어둡고 아늑한 카페에서 마셨던 커피를, 다 지나가버린 나날을 떠올리고, 그때를 감히 회상하는 오늘을 맞닥뜨린다. 분명 바라본 것은 그의 작업인데, 오롯이 내 안의 소리를 듣는다. ● 촛불처럼 흔들리는 마음에서부터 시작하여 소리로 가득 찬 붉은 방까지. 이 전시는 소리는 마음이라고, 그러니 당신의 마음을 바라보라는 무언의 제안이다. 세상이 먹먹하도록 화창한 봄날, 김기철의 전시를 만나고 나서는 당신에게 세상의 소리가 달라져 있기를 바란다. ■ 김소라

 

 

 

김기철_마트료시카_혼합재료_가변크기_2017~8

 

 

 

소리 안에서 시간을 바라보다 ● 4년 전 김기철 작가 개인전의 제목은 『침묵의 소리』였다. 보이는 무언가를 만드는 '조각'이라는 전통적 장르 안에서 보이지 않는, 흐르는 경험 속에서만 존재하는 소리를 조각의 재료로 다뤄오며 그는 지난 20여년간 고유한 작업세계를 구축해왔다. 소리란 무엇인가, 소리를 어떻게 볼 수 있는가라는 질문을 들고 그의 작업은 다양한 색과 결의 명제들을 탐색해왔다. 길고 짧음, 높고 낮음, 많고 적음 등 소리의 물리적 조건들을 재현한 초기작업에서부터 빗소리 같은 자연음으로 심상의 풍경을 만들어내는 감성적인 공간작업, 그리고 인간의 목소리와 관련한 소리의 의미론적 시원을 다루는 작업에 이르기까지 소리의 여러 층위들을 다루어온 그는 최근 가장 단단한 기저 가까이로 내려가 소리의 본질을 두드렸다. 소리의 대척점으로 여겨지는 침묵을 통해 소리를 말해보고자 한 것이다. ● 소리에 관한 명제들이 결국 끝점에 이르렀다는 것이기보다 그가 말한 침묵은 '침묵의 소리'라는 전시제목대로 역시 소리에 관한 것이었다. 침묵은 소리의 절대적 부재가 아니라 '들리지 않는', '듣고자 하지 않는' 소리라는 것이다. 소리란 듣는다는 인간의 주관적인 행위에 관한 것이고 결국 소리와 침묵은 마음에 관한 것이다. 철학의 경계로 다가서는 그의 조각적 명제를 해석할 때 필자는 『침묵(Silence)』이라는 제목으로 존 케이지의 글과 강연들을 모은 책에서 그의 생각을 좀더 구체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었다. ● 이 책에서 존 케이지는 실제로 침묵을 구현하려는 시도는 실패로 돌아간다고 말하며 무향실에 들어간 사람의 이야기를 예로 든다. 기술적으로 최대한 소리를 제거해 만든 방안에 들어갔지만 그 안에 들어간 이는 자신이 의도하지 않은 두 가지 소리 - 신경계가 작용하는 높은 소리, 혈액이 순환하는 낮은 소리 - 를 내고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는 소리 없이 삶은 단 한순간도 지속되지 못하며 침묵은 소리와 대립하는 것이지만 필연적으로 공존하는 것이라 말한다. 이는 곧 예술과 삶의 관계로도 치환되는 것으로 삶과 예술은 공존하는 것이지 서로를 배제할 수 없는 것임을 말하는 것이기도 하다. 예술이 일상의 모든 것을 뺀 순수한 무언가가 될 수 없듯이, 그 역도 불가능하듯, 침묵도 소리도 그런 것이리라. ● 삶의 스펙트럼에서 예술을 분리시키려 한 모더니즘 시대 많은 이들은 '순수'를 경험하기 보다 '소외'를 받아들였어야 했다. 시각 안에서 소외된 주체를 발견해야 했고 이곳, 지금, 나와 너로 구성되어 흘러가는 실제 세계에 속해 살아가면서도 여기에 발 담글 수 없는 육체 없는 자아와 마주해야 했다. 순간적으로 나의 눈을 사로잡아야 하는 예술작품 앞에서 시간, 관객, 장소와 같이 이를 지체하는 일상의 요소들은 세속적인 것으로 규탄받아야 했다. 그러나 이렇게 억지스러운 분리와 구분을 바탕으로 한 절대적 진공상태가 실제 존재하지 않듯이, 예술 안에서 지금, 이곳의 요소들을 받아들이고 그 공존을 논하는 것만큼 자연스러운 것도 당연한 것도 없다. 무향실에서 발견한 내 몸 속의 소리처럼 말이다. 소리를 탐구해온 조각가 김기철이 침묵과 소리의 공존을 읽어낸 것 또한 같은 맥락이다. 침묵을 소리의 영역으로 들여와 다룬 것은 그가 순수한 소리를 둘러싼 스펙트럼에 펼쳐져 있던 다른 요소들에도 관심을 확장하게 된 계기가 되었던 것 같다. 그리고 그 요소들 중 하나가 바로 이번 전시에서 다루고자 하는 시간이다. ● 사실 시간을 다룬다는 것은 그리 쉬운 일은 아니다. 완벽한 침묵을 경험할 수 없듯이 시간 또한 객관적이고 절대적인 실체를 파악할 수 없고 전체로서의 공간을 시간이 비틀어버리듯 모든 것과 관계하고 또 모든 것의 영향을 받는 것이 시간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김기철은 이러한 시간의 이슈를 복잡성을 전제로 다루지 않는다. 그가 시간에 관심을 가지게 된 것은 "소리를 듣는데 필수불가결한 것이 시간이었기 때문"이다. 상대성 이론이 관찰자의 존재를 전제로 하듯 소리(Sound) 자체보다 소리를 듣는다(Listening)는 지각과 인식의 문제, 소리를 어떻게 해야 볼 수 있는가라는 주체에 관한 맥락을 포함해 온 그의 작업은 시간에 대해서도 비슷한 입장을 취하지만 그것을 조각적으로 일으키는 방식은 그가 소리를 다뤄온 그것과 같이 간결하고 명쾌하다. ● 보이지 않는 소리를 길이와 볼륨 같은 볼 수 있는 조각의 언어로 옮겨온 것처럼 그는 흐르는 시간을 정지된 오브제로 붙들어 놓는다. 소리가 공기를 타고 퍼져나가는 소리의 순차적 개념을 형상화한 모습에 하나가 있고 그 다음에 하나가 오는 시간의 기본원리를 빗대어 보여준다. 소리의 본질에 천착해온 그에게 소리의 흐름과 흐르는 시간은 함께 겹쳐오는 것이기 때문일 것이다. 그는 만져지지 않는 시간을 오브제의 움직임을 통해서 손끝 감각으로 지각해보게도 한다. 내 앞에서 출발한 당구공이 다시 나에게 굴러오는 것을 보며 내 행위를 통해 구분되는 전후의 시간을 경험해보게 하거나, 50여개의 종이인형이 함께 또는 따로 빙글빙글 돌다 정지하는 모습을 통해서 돌이킬 수 없이 직선으로 흐르는 시간, 매일매일 반복되는 일상 또는 되풀이되는 역사와 같이 개개인에게 그리고 보다 거시적 차원에서 순환되는 시간의 흐름을 이야기한다.

 

 

 

김기철_마음_혼합재료_가변크기_2013~8

 

 

 

그는 또한 벚꽃의 낙화속도를 보여주는 작품을 통해 5cm/s처럼 시간이 물리적으로는 하나의 숫자로 표시되지만 바람에 떨어지는 벚꽃의 시각적 아름다움 앞에서 후드득 또는 하늘하늘 그 떨어짐의 시간이 어떤 이에게는 순간적으로 또는 누군가에게는 무한정으로 느껴진다는 시간의 주관성을 보여주기도 한다. 시간을 직선적으로 보는 서양과 달리 순환적인 것으로 보는 동양의 육십갑자를 기준으로 60여년전인 1950년 말 유행한 하드밥(재즈장르) 음악을 재생하며 소리의 문화사를 다루는 작품은 각자의 시간이 합쳐진 보다 거대한 흐름으로서의 시간, 역사를 해석하고 받아들이는 주체에 대한 이야기로도 확장한다. ● 빛의 유무와 달리 소리의 유무가 실제 있고 없음 보다 주관적인 것은 우리가 귀가 아닌 몸으로 듣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우리의 몸은 명백히 시간의 지배를 받는다. 육체가 시간 속에서 소멸해갈 때 가장 마지막까지 남아있는 감각은 청각이라고 한다. 우리에게 허락된 시간 곁에 가장 가까이 겹쳐져 있는 것이 소리이기에 소리의 본질에 천착해온 조각가에게 소리에 대한 관심은 시간에 대한 것으로 자연스럽게 움직여지는 것 같다. 깜박이는 빛보다 느리게 올지라도 흘러져야 내게 들어오게 되는 소리는 결국 '살아가는' 인간의 본질에 가깝다. 사람이 듣는 소리를 귀 기울여 들여다보는 김기철이 시간을 살아내는 나의 모습을 가만히 들여다봐주는 것 같아 고맙다. ■ 김은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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