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eeyoung KIM, Jeongtae GIM, Yunju SONG, Eunu LEE, Hyein LEE, Jaemin JANG
1. 전시개요
학고재는 2017년 7월 12일(수)부터 8월 6일(일)까지 학고재 신관에서 《직관 2017》展을 연다. 지난 2010년에 열린 《직관》展의 연장선상에서 마련한 청년작가 단체전이다. 학고재는 이번 전시에서 청년작가 6인의 작품세계를 살핀다. 김미영, 김정태, 송윤주, 이은우, 이혜인, 장재민에 주목했다. 각각 확고한 주관으로 자신의 작업을 풀어나가는 작가들이다. 작업 과정에 있어 직관이 작동하는 방식도 제각기 다르다. 직관적 판단에 붓을 맡기는 작가가 있는가 하면 논리와 직관 사이에서 작업의 균형을 찾는 작가도 있다.
학고재는 이번 전시를 통하여 역량을 갖춘 청년작가들의 작품세계를 조명하여 주의 깊게 살펴보고, 나아가 동시대 젊은 미술계의 관점과 동향을 파악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고자 한다. 제7회 뉴비전 미술평론상(2012, 아트인컬처)을 수상한 안소연 평론가가 전시 서문을 썼다. 학고재는 청년작가를 조명하기 위한 전시를 꾸준히 개최해 왔다. 지난해 열린 허수영(1984~, 인천) 개인전에 이어 오는 겨울에는 이우성(1983~, 서울) 개인전을 선보일 예정이다.
2. 전시주제
창작의 첫 번째 질료, 예술가의 ‘직관’
독일의 예술 철학자 콘라드 피들러(1841~1895)는 예술적 재능의 본질이 직관적 파악 능력이라고 말했다. 예술가의 직관은 작품 발상의 순간부터 완성에 이르기까지 끊임없이 영향을 미친다. 예술가가 논리적인 인과관계 이전에 대상을 어떻게 조형할 것인지 판단하게 하는 것이 직관이다. 같은 주제와 소재를 가지고 작업을 하더라도 하나의 작품을 위대한 작품으로 창조하게 하는 것이 직관적 판단의 힘이다.
예술가는 직관적 시선으로 대상의 근본을 파악하여 그 안에 내재해 있는 미와 균형을 이끌어낸다. 관람자가 작품을 감상하는 순간에도 직관은 논리에 앞서 발동한다. 직관은 예술작품을 매개로 하여 예술가와 관람자 사이에 공통된 정서적 경험을 전달한다. 학고재는 예술가와 작품, 그리고 관객 사이를 관통하는 직관의 실체를 통하여 예술의 본질과 그 목적에 대해 살펴보는 계기를 마련하고자 한다.
더 나은 미래를 모색하는 열정의 상징 ‘청년’
청년은 새로운 미래를 모색하는 열정의 상징이다. 청년 미술가들은 끊임없이 기성세대와 다른 새로운 관점을 제시하고 실험적 시도를 거듭하며 동시대 미술의 발전을 주도해왔다. 학고재는 우리 시대 젊은 미술계의 관점과 동향을 파악하기 위해 이번 청년작가 단체전을 마련했다. 다음 세대를 예측하고 그 기반을 만들어 나가고자 한다. 김미영, 김정태, 송윤주, 이은우, 이혜인, 장재민 등 6인의 작가를 선정했다. 서양화, 동양화, 조각, 미디어아트 등 다양한 매체로 작업하는 이들이다. 이 시대가 안고 있는 문제들을 그들만의 작업방식으로 풀어나가는 청년세대 작가들의 작품세계를 한 자리에서 만나볼 수 있는 기회다.
학고재 신관에서 선보이는 여섯 작가의 작품세계
이번 전시는 학고재 신관에서 열린다. 세 개 층으로 나누어진 공간에서 여섯 작가의 작품을 다채롭게 선보인다. 층마다 세 명의 작가를 배치한 구조다. 학고재 신관 1층에 들어서면 김미영의 신작 (2017)가 가장 먼저 시야에 들어온다. 흩날리는 초록의 이미지가 150호 캔버스 두 개를 가득 메운 작품이다. 정면에 이은우의 (2016)이 놓여 있다. 단단하고 무거운 재질로 보이지만 스티로폼으로 만들어진 조각이다. 오른편 벽에서는 김정태가 이번 전시를 통해 처음으로 선보이는 (2017) 연작을 차례로 감상할 수 있다. 고해상 디지털 이미지의 효과적인 출력을 위해 PVC 필름을 사용했다.
지하 1층으로 내려가는 계단에서 송윤주의 10호 신작 (2017)을 마주하게 된다. 작가의 대표적 연작으로, 동양 고전 「주역周易」의 괘卦를 소재로 하여 조형한 이미지다. 지하 1층 전시장에서는 동일 연작의 작품들도 만나볼 수 있다. 입구의 안팎에 이은우의 조각이 놓여 있다. 벽에 걸린 작품과 바닥에 놓인 작품 모두 (2016)이라는 동일한 작품명을 붙였지만 색상이 미묘하게 다르다. 작품마다 형태와 색상에서의 세심한 변주가 돋보인다. 이 공간에서 김미영의 신작 (2017) 등 회화들을 살펴볼 수 있다.
지하 2층 전시장에 들어서면 장재민의 대작 (2017)이 시선을 압도한다. 이번 전시에서 장재민은 특유의 힘찬 붓질로 그려낸 (2017), (2017) 등 신작 4점을 선보인다. 의 맞은편 벽에 걸린 이혜인의 (2017)은 8점으로 이루어진 작품이다. 이번 전시를 위해 제작한 연작이다. 시간과 빛의 흐름에 따라 변화하는 장미나무의 모습을 작품에 담아내려 한 모험적 시도가 돋보인다. 전시장 안쪽 벽에는 이은우의 신작 (2017)이 놓였다. 지난해 제작했던 동명의 작품을 새로 만들었다. 우레탄 페인트로 도색한 높은 채도의 빨간색이 작품의 기하학적 형태와 맞아떨어져 시각적으로 강렬한 이미지를 표출한다.
3. 전시서문
직관2017
새로움에 대하여
Hakgojae Gallery 2017.07.12 - 08.06
안소연
미술비평가
불쌍한, 새로운 날들의 문턱에 서서
지나간 세기와 아직 결정되지 않은 현재의 세기를 접합하는, 예민하면서도 말랑말랑한 관절을 지닌, 언제나 그러했듯 (이데올로기적) 범죄로 얼룩진 지상에 마치 어린양처럼 스스로 내버려져야만 했던, 바로 그 새로운 세대의 현전이 과거의 숱한 예언을 덮고 또 한차례 성취될 수 있을까? 나는 100년 전에, 그러니까 꼬박 한 세기 전에 쓰인 만델스탐 Ossip Mandelstam의 시를, 그리고 그 시로 세기에 대한 사유를 시도했던 바디우 Alain Badiou의 철학적 통찰을, 이미 시작된 새로운 세기와 대면하면서 떠올렸다. 아, 2000 년이라니. 벼랑 끝에 선 채 임박한 종말의 징후를 살피는 불쌍한 무리들과 그들의 몫으로 예정된 실패를 떠벌리는 예언가들의 날이 계속되고 있다. 누구도 한치 앞을 분간하기 어려운 새로운 세기는 무력한 나태 속에서도 거짓말처럼 엄청난 속도로 질주하고 있다. 확연한 실체는 없으나 분명 무언가 일어나고 있다.
어쩌면 채 지워지지 않은 세기말의 풍경처럼, 짙은 절망과 허무로 물든 퇴폐적 분위기가 현실을 집어삼킬 듯 보였다. 이전 세기와는 또 다른 차원에서 깊고 공허한 늪에 빠져버린 우리의 일상은, 곧 들이닥칠 주체의 파산 경고와 그로 인한 불안 때문에 스스로 벗어날 그 어떤 출구도 찾아내지 못할 것 같았다. 아니, 벗어날 그 어떤 시공도 보이지 않았다. 그렇게 위태로운 현시대의 풍경은 한동안 지속됐다. 제프 니콜스의 영화 (2011)의 허무한 줄거리처럼, 20세기가 남긴 물질적 유산은 더 이상 한 개인의 미래마저 보장하지 못한 채 도리어 그것을 담보로 오늘이라는 현재의 시공을 끊임없이 유예시켜왔다. 하여 새로운 세기의 10년이 완성되기도 전에, 무너진 중산층들의 일상은 앞선 세기에 수많은 죄목을 선고했다. 민주주의와 자본주의의 이데올로기적 범죄로 평범한 개인의 삶이 해체되었다는 과거에 대한 책임의식은, 아이러니하게도 새롭게 시작된 날들이 고통스런 암흑뿐임을 예언하고 있다.
이토록 불쌍한, 새로운 날들의 어두운 문턱에 서있는 “우리”는 이 폐허 속에서 또 다시 새로운 것에 대한 물음을 좇는다. 바디우가 인용했던 브레히트의 글 「프롤레타리아는 하얀 조끼를 입고 태어나지 않았다」를 다시 사유해보면, 그는 폐허 속에서 새로운 주체로서 프롤레타리아의 문화가 도래할 것임을 말했는데, 바로 종말의 때와 같은 그 폐허의 시공에서 새로운 것이 이미 만들어지고 있다는 예언적 선언에 가까웠다. 20세기 초의 일이다. 그렇다면, 지금 우리는, 뜨거웠던 20세기를 빠져 나와 직면하게 된 서늘한 폐허에서 우리는, 새로운 것의 생성을 다시 한 번 기대할 수 있을까?
흐릿한, 현실과 마주함
지난 세기의 끝자락에서부터 가속화된 디지털 테크놀로지의 확산과 그로 인한 오늘날의 새로운 “시각적 유대”를 공공연히 말하는 사람들은, 황무지 같은 현실을 재설정하여 미래를 일궈낼 주체의 새로운 감각에 대해 내심 기대를 거는 듯하다. 또 누구는, 동시대의 시각예술에서 지난 세기의 예술적 형식들이 재출현하고 병합되는 일련의 흐름을 진단하면서 그것이 바로 과거의 이데올로기적 관습에서 벗어난 디지털 커뮤니케이션 네트워크의 새로운 작동 원리임을 앞세운다. 이처럼 미래와 단절된 채 지독히도 허망하게 시작한 새로운 세기는, 유독 빈곤하고 불확정적인 자신의 “현실”에 주목하고 있다. 말하자면, 앞선 세기가 베일에 가려진 “실재”에 대한 치열한 논쟁을 부추겼다면, 새로운 세기의 첫 장은, 도리어 실재를 상상할 수조차 없이 암흑 혹은 블랙홀처럼 봉인 해제된 현실에서 스스로를 재인식할 수 있는 새로운 감각과 주체성을 촉구한다. 때문에, 2010년대 한국미술의 지형을 흔들어 놓은 굵직한 파동을 체험한 이들이라면 누구나 공유하고 있을 새로운 시각적 감성 혹은 감각이라는 화두로 망설임 없이 대화를 시작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학고재 갤러리가 2010년에 이어 두 번째 기획한 전시 《직관 2017》은, 흐릿하게 열화된 현실과 마주하려는, 이제 막 시작된 새로운 세기의 시각적 유대와 그것이 창출하는 지속적인 가치를 가늠해 보려는 시도로 보인다. 이번 전시에는 여섯 명의 작가가 참여하였는데, 그 중 다섯 명이 80년대 생이지만 그렇다고 그것이 어떤 세대의 특이성을 나타내는 절대적인 범주로 작용하기 보다는, 역으로 그 범주 안에 종속돼 있는 동시대적 감각으로서 주체들의 새로운 인식의 가능성을 시사한다. 이는 “스스로를 감각하는 사물로 제시하고, 사물을 감각할 줄 아는 것으로 받아들이기야 말로 동시대적 감각의 새로운 경험”이라고 진단한 페르니올라Mario Perniola의 말을 인용해, 그러한 감각이 그려내는 이미지들은 현실의 재현이 아니라 “현실세계의 파편”임을 강조한 슈타이얼Hito Steyerl의 논의와 붙여놓고 살펴볼 만하다.
전시 참여 작가 중 이혜인은, 똑같은 크기의 캔버스 여덟 개로 (2017) 연작을 완성했다. 하루 24시간을 8조각으로 나눠서 새벽 5시부터 해당 시간대에 3시간동안 마당의 장미넝쿨을 그린 이혜인은, 늘 그랬듯 현실의 풍경과 마주한다. 하지만 그가 주목해온 것은 현실의 진부한 풍경이 아니라, 그 풍경의 현실적 조건을 경험해내는 스스로의 주체적인 감각이었을 거다. 그는 현실을 재현하기 위해 마련된 회화의 고정된 자리를 거부하고, 도리어 표현할 수 없는 것, 즉 현실의 파편들을 받아들이기 위해 기꺼이 불확실한 풍경과 나란히 서서 그것과 마주하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따라서 펼쳐놓은 8점의 풍경 그림은 모두 진짜도 가짜도 아닌, 실패도 성공도 아닌, 이미지의 불확정적인 존재 조건을 암시한다.
김정태의 (2017) 연작은 데이터모쉬Datamosh 기법을 이용해 구현한 디지털 이미지다. 이번 전시에서는 55인치 혹은 30인치 모니터 화면 크기로 각각 최적화되었는데, 사실 이름조차 없는 이 이미지 출력물은 그가 최근 구축해 놓은 디지털 가상세계 (2017)에서 꺼내온 것들이다. 자신이 직접 그린 회화를 디지털 파일로 저장•압축•확장하여 일련의 데이터 표류와 이미지의 극단적인 소모를 통해 변형시킨 디지털 회화는, “피코”라는 가상공간 안에서 이미 극단적으로 절개된 이미지 복제품의 형태로 부유하고 있다. 그의 말마따나, 여러 조건들이 현실에서 다루면 너무 크고 어려운데 이 안에 넣었다가 빼면 무제의 디지털 회화처럼 한결 다루기 쉽고 편리해진다. 원본과 연동되어 있으나 이미 그것을 초월하여 극도로 가볍고 흐릿해진 한 더미의 잔해처럼 말이다.
이은우도 그렇다. 그는 현실에서의 주어진 조건을 살짝 비틀어 그 조건들을 원본 삼아 흐릿한 가짜 “물건들”을 생산한다. 전시된 작업들을 보면, 돌 같은 것, 나무 같은 것, 책장 같은 것, 탁자 같은 것 등 진짜를 대신 하는 가짜, 원본을 효율적으로 열화시킨 다수의 모조품이 실제의 공간을 그럴듯하게 차지하고 있다. 그는 마치 펼쳐놓은 이케아 카탈로그처럼 더 이상 새로울 게 없이 규격화된 현실을 데이터 삼아, 자신이 구축한 임의의 체계를 빠르게 통과해 어디에도 없는 매우 표피적이면서 압축된 형태의 실물로 구현시켰다. 진짜가 어딨냐는 그의 농담 섞인 물음을 생각해 볼 때, 어쩌면 흐릿한 현실을 마주하는 그의 시선에는 (2016), (2017) 등의 작업처럼 일련의 추상적인 형태와 색의 더미가 더 현실적인 존재로 지각될 수도 있었을 거다.
선명하게, 지워버린 길들
기억에 기반한 현실의 풍경을 그려왔던 장재민은, 뜻밖에도 더욱 노련해진 붓질을 통해 형태를 구축하려는 충동 대신 대상을 지우고 뭉개버리는 극단적 상황으로 우회해버렸다. 그는 자신의 그림 그리는 행위가 계속해서 형태를 망치고 다시 그것을 극복하는 과정의 연속이라 말한다. 그는 이제 캔버스 바깥을 더 의심하기 시작했다는 말을 덧붙였는데, 이는 내게 현실에서의 오작동이나 누락된 혹은 뒤엉킨 시간성 등을 매우 주체적으로 경험하기 시작했다는 뜻으로 들렸다. 현실의 풍경에 주목하되, 그 풍경 안에서 기묘하게 지워진 길, 즉 의미의 부재를 향해 줄달음치겠노라는 작가의 의지는 (2017)처럼 큰 그림 안에서 형태를 방해하며 도리어 그것을 에워싸는 납작하고 추상적인 붓질로 구체화되고 있다.
김미영의 추상(적) 회화도 이와 비슷한 정서를 공유하고 있다. (2017)나 (2016)을 보면, 그의 그림에서는 시각적 역전이 강하게 드러나 있다. 직관적인 붓질을 매우 강조하고는 있지만 그 조형적 근거가 때론 이성적인 사유 안에서 발생하는 경우도 있고, 평평한 화면에서 재료의 물성을 한껏 강조하고 있는 것 같지만 사실 표면의 물성을 초월해 이상할 만큼 깊숙한 공간감을 과시하기도 한다. 그것은 아마도 시선을 붙잡아 두는 고정된 주체의 자리를 애초에 포기하고, 부유하는 관찰자의 시점처럼 끊임없이 나타났다 사라지고 흩어지며 난반사되는, 현실에서의 파편화된 시각경험을 캔버스 화면 안에서 시도해보려는 게 아니었을까.
끝으로, 송윤주의 경우 중국의 유교 경전인 주역(周易)을 참조해 64개의 괘(卦)를 자신의 작업에서 일련의 추상적인 이미지로 다루고 있다. 그는 추상적인 기호의 조합으로 새로운 의미를 능동적으로 생성시킬 수 있다는 문자의 작동 원리에 주목하고 있지만, 그 추상적인 기호의 권위로부터 어마어마하게 떨어져 나온 오늘의 시공에서 그것은 매우 가볍고 표피적인 이미지만 남겨놓은 채 의미의 부재를 한없이 표출한다. 새로운 주체의 시각 패러다임에 있어서 상징적이고 객관적인 데이터의 유효성을 환기시킨다. 때문에 견고한 추상적 형태들이 무한히 반복되어 구축될 수 있는 여지를 언뜻 보이는 것 같지만, 오늘의 시공에서 그 추상성이 강조되면 될수록 의미의 부재는 더욱 강하게 체감될 것이다.
이브 본푸아Yve Bonnefoy의 시에서 바디우가 인용해온 “지워버린 길들”이라는 표현은, 기묘한 미소로 실재의 의미 부재를 향해 달려가는 열정적인 20세기의 풍경을 함축하고 있다. 바디우는 부재의 상태에서 알 수 없는 희망의 문턱을 넘는/넘어야 하는 아이러니를 20세기의 주체적 격언이 아닌가 사유한다. 또한 만델스탐의 시 마지막 부분을 인용하면서 20세기는 “감옥이면서 동시에 새로운 날”이었음을 말한다. 그리고 새로운 날들의 시작은, “관절이 굳어버린 하루하루의 무릎들을 피리(예술)가 하나로 모아야” 성사된다. 지금은 21세기다. 100년이 훌쩍 지난. 그렇게 새로 시작된 날들이 잿빛 폐허가 되어 오늘 우리 시대의 토양이 되었다. 어쩌면 세기의 비극이 다시 반복된 것도 같다. 우리는 지금, 지워버린 길들 위에서, 흐릿한 현실과 마주해야 하는, 그리고 (바디우의 표현을 빌어) 미래의 약속도 순수한 향수도 아닌 “그대로의 기다림” 속에서 현실의 피리 소리를 듣게 될 것이다. 이 불쌍한, 새로운 날들의 문턱에 서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