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고재 디자인 | 프로젝트 스페이스는 2021년 2월 3일(수)부터 2월 28일(일)까지 유석일(b. 1984, 서울) 개인전 《쉼 없는 불》을 연다. 2021년도 1분기를 여는 첫 전시다. 유석일이 지난 2년여간 제작한 신작 회화들을 처음 선보인다. 일상에서 발견한 소재에 의미를 부여하고 치열하게 묘사한 면모가 돋보인다. 타는 불의 형상을 소형 캔버스 42점 위에 반복해서 그린 〈장작불〉 연작을 비롯해 〈날지 못하는 비행기 접기〉, 〈지난 기억〉 연작 등 52점의 회화를 다채롭게 만나볼 수 있다. 유석일은 1984년 서울에서 태어났다. 2011년 홍익대학교 미술대학 회화과를 졸업했다. 2019년에 첫 개인전 《익스플로전》(백룸, 서울)을 열었다. 갤러리 현대(서울), 뉴욕 한국문화원 갤러리 코리아(뉴욕) 등에서 연 단체전에 참여했다. 현재 서울에서 거주하며 작업한다.
- 작가와의 대화
Q. 첫 개인전 이후 2년 만이다. 어떤 작업을 선보이나.
이전 작업에서는 유년기의 기억을 소재로 다뤘다. 만화적 기호들을 참조해 회화로 옮기는 작업이었다. 2019년 가을 뉴욕 여행을 떠났다. 다양한 전시를 관람하며 기존의 작업 방식에 대해 고민했다. 먼 타지에서 오히려 더욱 가까운 내면을 돌아보게 됐다. 조금 더 ‘지금의 나’를 다루는 그림을 그려야겠다고 생각했다. 최근의 기억들로부터 소재를 찾고, 주위의 풍경에 나를 투영하고자 했다.
2018년부터 2019년까지 1년여간 동해에서 타지 생활을 했다. 이때의 경험을 〈장작불〉 연작의 소재로 삼았다. 보금자리가 바뀌면 삶에 대한 태도가 변한다. 생각과 감정에도 영향을 끼친다. 놓인 환경에 따라 기억의 형태도 변모한다. 같은 기억도 떠올리는 당시의 상황에 따라 다르게 느껴진다. 2020년에는 성수동에 새 작업실을 마련했다. 이곳에서 새로운 풍경을 마주하고, 또 다른 방식의 삶을 살게 됐다. 주위 환경으로부터 회화의 소재를 얻고 있다.
Q. 전시의 제목을 《쉼 없는 불》로 정했다. 전시의 대표작도 〈장작불〉이다.
도시를 떠나 타지 생활을 하던 시기에도 온전한 휴식의 시간은 많지 않았다. 늦은 밤 해변에서 장작을 태우던 시간이 나의 일과 중 ‘쉼’이었다. 타오르는 불을 가만히 바라보고 있으면 생각이 많아진다. 과거의 일들을 떠올리고, 스스로의 모습을 돌아본다. 정적 속 혼자만의 시간, 오래된 기억과 감정들이 교차하며 쉬고 싶은 마음을 끊임없이 괴롭힌다. 시간이 흘러도 지워내기 어려운 기억들은 마치 불길에 타고 남은 잿더미 같다.
드럼통 안에서 타오르다 꺼지고 마는 장작불에 나의 모습을 투영해봤다. 타는 열정과 벗어나기 어려운 울타리, 짐처럼 남은 잿더미에 대해 생각했다. 〈장작불〉은 작은 캔버스에 불의 형상을 수없이 반복해서 그린 연작이다. 이내 꺼질 듯한 불씨의 모습을 화면 위에 쉼 없이 태우려 했다. 불은 매 순간 다른 세기로, 새로운 형태로 타오른다. 한시적으로 타다 마는 열정이더라도 끊임없이 반복하면 영속적인 것으로 만들 수 있다.
Q. 〈지난 기억〉과 〈날지 못하는 비행기 접기〉 연작에 흰 천과 의자의 형상이 등장한다.
또 다른 ‘쉼’에 대한 이야기다. 두 소재 모두 휴식과 위로의 의미를 담은 오브제다. 작업실의 접이식 의자를 주로 그렸다. 앉을 수 없도록 접어둔 의자의 모습에 스스로의 감정을 비추어 봤다. 담요처럼 덮어 둔 흰 천이 때로 따뜻한 위로처럼 느껴지다가, 또 다른 순간에는 도리어 쓸쓸함을 증폭시켰다. 천 위에 위로의 문구를 적었다. 글자들이 뒤집히거나 부분적으로만 드러나 의미를 알아볼 수 없다. 그렇기에 상대에게 온전히 전해질 수 없는 위로다. 이 천으로 비행기를 접는 일을 상상해봤다. 비행기 접기는 가장 기초적인 종이접기인데, 힘 없이 늘어지는 천으로는 도무지 제대로 접을 수 없다. 그림 속에서 접어낸다 해도 공중에 날리는 일은 불가능할 거다. 스스로 날아오르기에 자신이 없거나, 모든 일이 불가능하게만 느껴지는 때가 있었다. 그럴수록 작업에 더욱 몰두하려 애썼다. 상상으로나마 비행기를 접는 일은 계속되어야 한다.
- 작가노트
장작을 드럼통 안에 차곡차곡 겹겹이 쌓아 올린다. 쌓인 장작 틈 사이로 한참을 불을 지피다 보면 서서히 커져가던 불씨는 어느새 불길이 솟아 활활 타오르기 시작한다. 마치 주변의 모든 것을 태워버릴 듯한 화력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 그 힘을 잃고 더 이상 번지지 못한 채 드럼통 안에서 잿더미로 남게 된다.
지난겨울 타지 생활을 하던 나는 이러한 과정을 수없이 지켜보았다. 기세 넘치게 타오르던 불길이 결국 부식되고 변색된 드럼통조차 벗어나지 못하는 현상에 스스로의 모습을 중첩시켜 떠올리곤 했다. 타올랐던 열망은 철통의 테두리 안에서 그 빛을 잃어가고 소멸되고자 했던 기억은 잿더미의 흔적으로 남아있다.
나는 당시를 회상하며 장작불 연작을 진행 중이다. 화면 속 불씨는 모두 모노톤이다. 나에게 있어 회색빛의 형상은 '기억'이라는 단어를 떠올리게 한다. 경험하지 못한 시절이 담긴 흑백사진 일지라도 바라보고 있자면 왠지 모르게 지난날의 기억이 떠오른다.
지난 기억은 의자로 대체되어 바닥에 놓인다. 접혀있는 의자에선 휴식을 취할 수 없다. 되려 의자에게 쉼을 주듯 이불 같은 천이 덮여있다. 천으로 비행기를 접어본다. 접힌 비행기는 그 형태를 유지할 수 없으며 날지 못해 불완전하다. 소멸될 수 없는 기억과 현재의 내 모습이 공존한 채 화면에 담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