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로가기 메뉴
컨텐츠바로가기
주메뉴바로가기
하단메뉴바로가기
외부링크용로고

People불안한 일상, 추억으로 그리다, 하이경 작가

2016.01.25

[머니위크] 서대웅

  • 페이스북
  • 구글플러스
  • Pinterest

/사진=임한별 기자

비가 내렸다. 억수같이 쏟아졌다. 정성껏 준비한 제주로의 첫 모녀여행이었다. 차를 빌리고 '두모악'으로 향했다. 이름 모를 작은 식당에 들어갔다. 창 너머로 몇 발자국 안될 법한 작은 도로가 눈에 띄었다. 문득, 그리고 싶어졌다. 풍경을 카메라에 담았다. 하이경 작가(44) 명함 뒤편을 장식한 작품, 그의 대표작이기도 한 '두모악'은 그렇게 탄생했다.

"첫 모녀여행이었어요. 게다가 제주도 여행인데 얼마나 열심히 준비했겠어요. 배는 고픈데 비가 내려 심난한 상황이었죠. 작품은 여행 후에 그렸어요. 볼 때마다 그때가 떠올라요. 힘든 상황이어도 지나고 보면 추억이 되잖아요."

◆일상의 풍경서 '한국적인 것' 관조

하이경 작가는 일상의 풍경을 소재로 삼는다. 그에게 일상은 현대인의 삶이다. 그는 이를 "가장 한국적인 것"이라고 설명한다. 통상 고궁·도자기 등을 '우리 것'이라 여긴다. 몰개성적이고 색 없는 도시의 풍경은 '주변의 것'으로 치부되기 마련이다. 하지만 생활인이 이 무미건조함을 거부하긴 힘들다. 그것은 분명 현대인이 딛고 서 있는 삶의 터전이기 때문이다.

"저도 한 남자의 아내이고, 아이의 엄마예요. 밥을 짓고 빨래를 해요. 쳇바퀴 도는 삶을 살죠. 때론 염증도 느끼고요. 하지만 그런 일상 속에서 위안을 얻기도 해요. 긴 여행 후 집에 도착했을 때의 안도감이랄까요."

그래서일까. 그의 작품에는 유난히 집 앞 어두운 밤거리가 많다. 주중에 집 앞 낮 풍경을 볼 수 있는 이는 드물다. 우리 대부분은 새벽 버스·지하철에 몸을 싣는다. 하루 밥벌이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 어두컴컴한 도로 위로 가로등 불빛이 앉아있다. 이 길을 포기할 수 있는 생활인이 얼마나 될까. 피하고 싶지만 매일 마주해야 하는 현대인의 숙명. 하 작가는 이를 관조한다.

사실 하 작가도 대학 졸업 후 첫 10여년간은 '미생'이었다. 대학에서 회화를 전공했지만 작가의 삶을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여러 직장을 다녔다. 과거 그림을 그렸다는 사실은 잊혀져 갔다. 반복되는 일상에 숨막혀 하고, 때론 익숙한 틀 안에서 안도하며 지냈다. 직장인·엄마로서의 삶이 그를 지배했다. 대학시절까지 쌓아온 예술적 감수성은 희석돼 갔다.

"우연한 기회에 대학 동문의 전시장에 갔어요. 작품을 봤죠. 순간 '퍽' 하고 뒤통수를 맞은 느낌이 들었어요. '나도 작업하고 싶다.' 전혀 생각하지 않았는데 갑자기 그런 느낌이 들었죠. 2007년, 다시 그림을 시작했어요."

두모악(Dumoak), 130.3X193.9cm, oil on canvas, 2015. /사진제공=하이경 작가

◆그림은 '위로'와 '해소'의 창구

하 작가에게 작품 활동은 "위로와 해소의 창구이며, 삶의 구도의 한 방식(2015년 개인전 '익숙함의 위로' 작가노트 중)"이다. 하 작가에 따르면 현대인들은 반복된 삶에서 안온함을 느낀다. 즉, 일상을 벗어나고 싶어 하면서도 일상을 통해 그들 스스로가 '불안하지 않음'을 선택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하 작가는 작품 활동을 통해 생활인의 불안을 해소한다.

"작업을 다시 시작하게 된 것에 감사해요. 내 인생에서 몇 안되는 중요한 선택이었어요. 물론 힘들죠.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작가는 가난하잖아요. 그렇지만 작업을 하다 보면 저를 괴롭히던 고민이나 아픔이 잊히는 순간이 생겨요. 힘들지만 즐거이 살 수 있는 이유죠. 그런 면에서 작가는 비록 배고프지만 누리는 게 많다고 봐요."

하 작가는 그의 작품 활동을 직업적 수단으로 여기지 않는다. 상업적 목적을 지니고 작업에 임하지 않는 것이다. 덕분에 솔직하게 작품 활동을 할 수 있다.

"물론 조금 미화하고 싶을 때도 있어요. 하지만 목적을 가지고 작업을 하고 싶지는 않아요. 상업적 작가보다는 '쟁이'들이 좋아해주는 작가로 남고 싶어요. 뻔뻔할 수도 있지만 '좋아해주면 고맙고, 아니면 말지'라는 생각이에요. 하고 싶은 얘기를 할 뿐이죠."

겨울비(Winter rain), 72.7X60.6cm, oil on canvas, 2015(왼쪽)와 고잉홈(Going home), 72.7X60.6cm, oil on canvas, 2015(오른쪽). /사진제공=하이경 작가

그렇다고 그가 하는 얘기를 알아달라고 강요하지는 않는다. 그저 일상적 풍경, 영화나 책을 보며 다가오는 순간적인 느낌을 덤덤하게 표현할 뿐이다. 의도가 개입된 작품일지라도 이는 작가의 개인적인 사유라 여긴다. 사람들이 생각하는 바와 맞아 떨어질 수도, 아닐 수도 있다.

"어떤 것이 내 진짜 모습일까 생각해 본 적이 있어요. 하지만 이 모습도, 저 모습도 모두 제 자신이었죠. 작품도 마찬가지인 것 같아요. '이건 이렇게 읽어야 해' 이런 건 없어요."

하 작가는 "정지된 장면이지만 마음이 일렁이는 작품을 그려내고 싶다"고 말한다. 고요하지만 마음이 요동치는 작품이 좋은 작품이라 믿는다. 일상의 풍경을 진솔하게 대함으로써 스스로 위로를 얻어내듯 현대인에게 위로를 건네려는 것은 아닐까. 작품을 넘어 집 앞의 어두컴컴한 길목에서 주변인들의 일상이 행복하기를 바라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하 작가는 스스로에게 주문을 건다. "고요하되 일렁일 것. 다르되 같을 것. 맺되 풀 것."


[email protected]

최상단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