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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eople증권맨은 어떻게 나전칠기 명인이 됐나

2015.07.20

[뉴시스] 신진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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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전칠기 명인 김영준(사진=서대호 케이브스튜디오) 2015-07-19

빌 게이츠 1억 게임박스 만든 김영준 작가
"남이 가는 반대 방향에 ‘꽃길’ 있다" 결심
30대 중반에 나전칠기 인생이모작에 나서
중국서 '모택동 사진' '진시황 어보' 의뢰받아


“나전칠기보다 테니스가 더 어려워. 30년 했는데 다시 배우고 있다.”

1000년 동안 비전(秘傳)된 전통공예 중 나전칠기를 현대적 조형과 미감으로 발전시킨 김영준 작가(56)는 ‘반전의 남자’다.

빌 게이츠 마이크로소프트 사장의 요청으로 1억 원짜리 게임박스를 제작한 나전칠기 명인이지만 30년 전에는 증권사의 애널리스트였다. VIP고객만 상대하며 매주 방송에 출연할 정도로 유명했지만 딱 10년 3개월 만에 그 잘나가던 직장을 관뒀다.

나전칠기도 기존의 정통기법을 계승하기보다 현대미술 및 예술가구로 승화시켰다. 까만 자개장롱에서 벗어나 컬러 자개를 개발해 특허를 냈고 컬러장롱에서 나아가 아랍에미리트 공주도 사간 현대적 디자인의 화장대와 보석함, 콘솔을 제작했다. 자개로 현대미술, 그것도 추상화를 하고 도자기도 만들었다. 호텔 욕실, 호화 유람선과 요트, 비행기 일등석, BMW 자동차에도 나전칠기를 적용해 다양한 협업작품을 선보인다.

김영준 'Xbox'(33×23×10㎝, 자개에 옻칠) 2015-03-10

얼마 전 경기도 포천에 있는 작가의 공방에 갔을 때 김영준 작가는 예상과 달리 ‘작업 중’이 아니었다. 운동을 하고 온 그는 알고 보니 대학시절부터 테니스를 친 ROTC출신이었다.

김영준 작가는 “존경하던 스티브 잡스도 죽고 삼성 이건희 회장도 쓰러지는 것을 보고 저렇게 부와 명성이 높은 사람도 건강 앞에 쓰러지는구나 싶더라”며 “오래 살고 싶다기보다 남은 인생 건강하게 살려고 다시 테니스를 친다”고 했다.

공방은 140평으로 넓었으나 세계적 고객을 둔 작가의 작업실치곤 그 내부가 소박했다. 우리나라에서 전업 작가로 사는 게 녹록치 않다는 방증일까? 10년 전 서초구 서초동에 번듯하게 매장을 차려놓고 직원도 5명 정도 뒀던 그였지만 결국 철수했다. 지금은 단 한 명의 견습생을 두고 있다.

김 작가는 “빌 게이츠에게 주문의뢰를 받기 전이었는데 장사는 그럭저럭 잘돼 월 2000~3000만 원 정도 벌었다"며 "하지만 내 인건비가 한 푼도 안 나왔고 나중에는 직원도 장난을 쳐 매장 정리하고 2달간 택시운전을 했다”고 했다.

김영준 작가는 오는 23일 개막하는 2015평창비엔날레에 개인작업한 ‘코스모스’등을 선보일 예정이다. 나사(NASA)의 우주사진을 보고 영감을 받아 제작한 시리즈로 이 작품을 만들면서 “자개는 보는 각도가 아니라 사람의 마음상태에 따라 다르게 보인다”는 것을 알게 됐다.

상업적으로는 최근 중국 부호에게 ‘모택동 사진’과 ‘진시황 어보(御寶)’등을 나전칠기로 제작해달라는 의뢰를 받았다. 주문제작의 절반 이상이 이렇게 해외에서 들어온다.

“직장생활 5년차에 일본사람이 쓴 ‘인생이모작’을 읽고 남들보다 일찍 제2의 인생을 고민했다. 나전칠기는 사양사업이었지만 친구가 하던 가구공장에서 영롱한 빛의 자개에 푹 빠졌다. 주식격언에 이런 말이 있다. 남이 가는 반대 방향에 ‘꽃길’이 있다. 촛불은 꺼지기 전에 가장 밝다.”

김영준 '나전칠기항아리'(직경 60㎝, 백자에 자개와 옻칠) 2015-03-10

한편 김영준의 공예작품은 런던 주영한국문화원(UK. London)에서 상설 전시 중이며 빌 게이츠(마이크로소프트), 대한민국 청와대, 주중한국문화원(북경), 주오스트리아대사관, 삼성전자, 뉴욕한국박물관 등에 소장돼 있다.

- 30대 가장이 직장을 관두는 게 보통 결단이 아니다.

“84년 동서증권에 입사한 이후 10년간 주식시장이 두 번 크게 출렁였다. 덕분에 돈도 많이 벌었다. 주식이 80배까지 올라서 서른 살도 안 돼 아파트 3채를 샀다. 하지만 주식이 내릴 때는 스트레스가 심했다. 잘나가던 지점장도 바로 대기발령이 났다. 암으로 죽는 사람도 봤다. 나중 일이나 한 입사동기는 사채로 주식을 하다 못갚자 독일로 도망가 월북하려다 안기부에 붙잡혀 뉴스를 장식했다. 아무튼 한 5년 되니까 평생 못하겠더라. 무엇보다 내 노력과 무관하게 주식이 오르내려. 내가 열심히 잘할 창의적인 무엇을 찾고 싶었다. 일본사람이 쓴 ‘인생이모작’을 읽고 딱 10년만 채우자고 마음먹었다. 10년 3개월쯤 본사서 지점으로 발령이 나서 ‘이 때다’ 하고 관뒀다. 두 딸이 초등학생과 미취학 상태여서 아내의 반대가 심했다. 하지만 다 던졌다.”

- 미술전공자도 아닌데 어떻게 나전칠기를 하게 됐나?

“중학교 때 미대 가라고 권유를 받은 적은 있다. 하지만 미대 진학은 꿈도 못 꿨다. 제가 강원도 철원이 고향인데 70년대 당시 대학 간 사람이 한 명도 없었다. 그저 취직이 잘되는 대학에 가는 게 최선이었다. 아버지가 대령으로 은퇴하고 버스터미널을 했는데, 그 정도면 시골서 부유해 대학진학이 가능했다. 자개는 친구가 가구공장을 했는데 거기서 우연히 접하고 그 황홀한 빛에 빠졌다. 남들 안가는 길을 가라고 다들 이 분야를 떠났지만 저는 오히려 이거다 싶더라.”

- 나전칠기는 전통공예인데, 국내서 안배우고 유학을 갔다

“전승보다는 나전칠기의 현대화가 해답 같았다. 전통 장인들을 한때 찾아다녔는데 그다지 배울 게 없었다. 심지어 옻칠 대신 합성도료인 ‘카슈칠’(카본도장)을 하는 경우도 많았다."

김영준 COSMOS 80cm 우드 옻칠 자개 2015 (사진=2015평창비엔날레조직위윈회) [email protected] 2015-06-03

김영준 작가는 미국의 LA 아트&디자인아카데미스쿨, 이탈리아 도무스 아카데미(디자인 특별과정)에서 수학했다. 또 옻칠로 유명한 일본 가나자와에서는 칠기 기법을 배웠다. 자체 기술개발에도 힘썼다. 자개의 입체감을 내는 기법, 옻 원액 정제 기술, ‘컬러 옻칠’ 기술 등으로 특허를 냈다.

"2004년인가 특허기술로 만든 제품을 전시했는데 딸들 세대는 엄마가 좋아하겠다고 하고, 나이든 엄마세대는 자기가 죽으면 딸이 버린다고 안 사더라. 그래서 젊은 층이 선호할 디자인혁신에 매달렸다.”

차별화, 고급화를 위해서 자개는 중국재를 쓰지 않고 원재료인 전복과 소라 등을 구해다 작품에 맞게 가공을 의뢰한다. 이 때문에 모방불가한 자기만의 색깔을 낼 수 있다. 나무가 아닌 플라스틱에 자개를 붙인 것도 그가 처음이다. 빌 게이츠가 엑스박스 제작을 의뢰했을 때 이 특허기술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 2008년 빌 게이츠 때문에 주목받고 작년에 프란치스코 교황 의자를 만들어 또 이름을 날렸다.

“제가 그동안 돈을 많이 벌기도 했지만, 또 많이 썼다. 기회가 되면 해외전시에 참가했는데 그게 다 연결됐다. 빌 게이츠는 프랑스에서 한 제 초청개인전을 우연히 보고 작품을 의뢰한 경우다. 프란치스코 교황 의자는 경기도 연천에서 저소득층 대상 ‘화요일아침예술학교’를 운영하는 홍문택 신부와 인연을 맺으면서 하게 됐다.”

당시 여러 작가가 교황방한을 앞두고 명동성당 미사를 집전할 때 사용할 의자를 만들었고, 교황청에서 이름표를 다 뗀 채 의자를 심사했다. 최종적으로 교황의 성품과 닮은 소박하지만 품격 있는 김 작가의 의자가 선택됐다. 그는 이 의자에 옻칠을 무려 33번이나 했다.

- 명성을 얻기까지 결코 순탄하지 않았는데 어떻게 견뎠나?

2014년 프란치스코 교황이 명동성당 미사를 집전할 때 사용한 의자로 김영준 작품(사진=국보칠기) 2015-07-19

"그게 힘들 때마다 도와주는 사람이 나타났다. 한 10년간은 투자만 했다. 공부하고 전시 나가고 작업하니 아파트 3채가 다 없어졌다. 덕분에 이혼 위기도 3, 4번 겪었다. 진짜 법정까지 갔다. 40대 중반에 서초동 매장 정리하고 홀로서기를 하면서 조금씩 일이 풀기기 시작했다. 그때 두 달간 택시운전을 했는데 정말 사람들 사연이 다양했다. 나 고생한 거는 아무것도 아니더라. 돈은 긍정적으로 생각하니까 들어오더라. 아내가 노후 걱정 많이 했는데, 사실 빌딩을 갖고 있으면 뭐하나? 그게 돈인가? 쓰고 싶을 때 써야 돈이다.”

김영준 작가는 요즘 ‘코스모스’에 LED작업을 접목하고 있다. 미완성작품을 보여주며 의견을 묻기도 한 그는 “LED나 광섬유 빛을 융합해 자개의 새로운 빛을 내고 싶다”고 했다. ‘코스모스’ 작품을 100개 만들어 미국에서 전시하는 것도 죽기 전에 해보고 싶은 일이다.

“명성이 쌓이면서 전시 때마다 새로운 것을 선보여야 한다는 중압감도 느낀다”며 창작의 고통도 호소했다. 하지만 평생 할 일을 찾은 자의 여유가 느껴졌다.

요즘 그는 부쩍 ‘비워야 채워진다’는 말을 실감한다. “그걸 깨우치면 인생이 행복해져. 근데 그게 쉽나? 천당과 지옥을 몇 번 갔다 오니까 알겠다.”(웃음)

얼마 전 백화점 명사초청에 갔다 왔다는 그는 중년여성들에게 “꿈을 포기하지 말라”고 조언했단다.

“70세에 성공한 사람도 많다. 나이는 중요하지 않다. 난 평생 할 일을 찾았다. 남보다 빨리 고민해 지금 이렇게 풀렸다. 내가 옳다는 것은 아니다. 다만 우리는 이제 100년 살 준비를 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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