갤러리 수는 2018년 5월 2일부터 6월 2일까지 중국 바링허우 작가 지엔처 Jian Ce의 개인전 《배너맨 Bannermen 》을 개최한다. 전시의 타이틀이자 선보이는 신작 시리즈 중 하나인 《배너맨 Bannermen 》은 과거의 전쟁터에서 깃발을 드는 사람, 즉 군대의 기강을 잡는 인물을 뜻하는데 기수없는 백명의 부대보다 기수가 있는 열명의 부대가 더 강하다고 할 정도로 중요한 역할을 맡았다.
갤러리 수는 동시대 중화권 작가들, 특히 차이나 아방가르드 이후 국제적인 공감대를 형성하고 있는 차세대 중국 작가들을 한국에 조명하고 있다. 그 일환으로 이번 국내에서 처음으로 열리는 지엔처의 개인전을 통해 예술학, 도상학, 철학 등 서양 학문에 심취한 학문가인 동시에 중국 출생으로 유럽에서 교육받고 자랐지만 동서양의 전통 역사와 문화를 접한 경험을 통해 독특한 관점과 사유를 지닌 작가의 신작 총 19점과 스케치 14점을 선보이며, 차이나 아방가르드 이후 바링허우 세대의 동시대적인 미술 사조를 들여다보는 기회를 제공할 예정이다. 선보이는 신작들은 일련의 세 시리즈 '배너맨 Bannermen', '작은 함대 Armada Small', '요새 Shield Hall'로 구성된다.
중국 산동성에서 태어나 4살이 되던 해 독일로 이주한 지엔처는 회화 작가로서는 드물게 베를린 예술대학 회화과 학사과정, 홈볼트 대학 예술사 및 철학 석사과정, 베를린 자유대학 동아시아 예술사 석사과정, 런던 골드스미스 유학 및 도상학과 철학 박사과정을 밟으며 자신만의 독특한 관점으로 회화를 통해 본인의 도상적 사유를 시각적으로 이끌어낸다. 작가는 고전과 현대의 회화적 본질에 대한 자신만의 도상학적 관점을 토대로 이미지를 해체하고 재조립하며 동시대 디지털 사회 속 사물이나 현상을 탐구한다. 이번 전시의 대표작품인 '배너맨 Bannerman' 시리즈는 로봇의 머리나 헬멧, 중세의 갑옷 혹은 아프리카 가면들로부터 착안한 이미지로, 연합을 위해 전쟁 시기에 특정 통치자에게 맹세를 다짐했던 역사 속 기사들을 모티브로 한다. 한 통치자 아래 연합된 계층 구조에 속하는 기수들은 하나의 목적을 완수할 의무를 지니지만 각기 다른 개별적 존재이다. 작가는 배너맨들의 동등한 지위를 페인팅이라는 동일한 포맷을 통해 드러내는 반면, 각기 개별적인 그들의 존재를 서로 상이한 형태를 통해 표현해낸다. 한 통치자 아래 하나의 목적으로 결속된 이들의 지휘는 일사불란하다.
또 다른 신작 시리즈 '작은 함대 Armada Small'는 작가가 2016년에 시작한 군함 이미지 재조합 시리즈인 '군함 Warship'의 후속작으로서, 1차 세계대전 중 영국군이 독일 어뢰의 공격으로부터 함선을 지키기 위해 발명한 이른바 ‘카모플라주 함선 (dazzle camouflage)’으로부터 착안했다. 지엔처의 작업 속 군함들은 단순한 컨텐츠로서1차 세계대전 혹은 2차 세계대전의 역사적인 잔류물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현대 문명과 세계 질서에 수반되는 모든 종류의 전쟁, 갈등 등의 의미를 내포한다. 작가는 야심찬 기술적 무기나 군함들이 군사력, 군사동맹의 상징물을 뛰어넘어 국력, 군사통제, 영토방어, 무기수출 등 세계화된 시스템에 속한다고 본다. 그렇다면 작가가 제시하는 카모플라주라는 주제는 또 다른 차원에서 어뢰를 피하기 위함이 아니라 대중의 이목으로부터 국제 분쟁과 군사적인 위협을 감추기 위해 다른 무언가를 앞세워두는 오늘날의 상황과 밀접하게 관련된다고 볼 수 있다. 지엔처는 이 주제가 동시대적 관점에서 중요성을 가진다고 믿으며 반추상적인 회화적 구성으로 이미지를 만들어내는 것, 그 이상에 관심을 두고 있다고 말한다.
'요새 Shield Hall' 시리즈 6점은 6명의 배너맨들이 이끄는 부대의 문장(heraldry)을 허구적으로 그려낸 이미지로서, 3층 전시장의 한 벽면에 일렬로 배치되어있다. 지엔처는 '요새 Shield Hall' 시리즈 작업에 임하며 국제적인 축제 따위에 장식되는 만국기 이미지를 떠올리며, 정치적으로 하나의 공식적 규칙 아래 서로 다른 독립체들이 한 커뮤니티로 결속되는 현대 사회 속 일면을 배너맨이 들고 있는 방패 속 문장(heraldry) 이미지 그리고 군사적인 방어 시설인 요새의 모습에 빗대어 표현한다.
이번 전시에 선보이는 지엔처의 신작들은 현대 사회 속에서 결속되기도 하고 소실되기도 하는 개개인의 모습에 대한 알레고리이다. 지엔처는 도상학적 관점을 통해 이미지를 해체하고 재조립하며 연대기적 서술을 하거나 동서양을 구분하는 회화 대신에 과거와 현재, 서양과 동양, 선대와 후대를 자유로이 넘나들며 주관적인 사유와 방식으로 재배열을 시도한다. 이런 작가의 주관적 회화는 본질적으로 현대 시각적 매체에 비해 비교적 덜 정교한 회화의 자체적 한계에서 비롯한다. 하지만 작가는 이런 속성에 오히려 흥미를 느껴 미술사 뿐만 아니라 컴퓨터 그래픽이나 지도에 적용되는 도식 규칙을 분석하고 차용하여 그려낸 이미지들을 통해 현대 사회 속 동시대적인 주제들을 재구성한다. 지엔처의 작품은 새로운 회화의 제안이 아닌, 여러 가지 도상을 지닌 주관적 회화의 잠재성과 창조성을 드러낸다.
지엔처의 페인팅 앞에 선 관객들은 기하학적인 비율로 조합된 기술적인 이미지와 페인팅이라는 매체의 아날로그적인 요소 간의 교차점에 서게 된다. 우리는 로봇의 형상을 한 기수, 분해되고 재배열된 함대, 일렬로 늘어서서 요새의 형태를 띄고 있는 문장(heraldry)을 바라보며 이질감을 느끼는 동시에, 지금의 시국과 묘하게 맞물려 형언할 수 없는 연대감을 느끼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