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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관 30주년, 베니스비엔날레를 환하게 밝힌 한국미술의 밤

[뉴시스] 박현주 | 2024.04.22

한국문화예술위원회(위원장 정병국, 이하 예술위)가 한국관 건립 30주년 특별전시 '모든 섬은 산이다 Every Island is a Mountain'를 지난 19일 공식 개막했다. 베니스비엔날레 국제미술전 기간 동안 자르디니와 아르세날레를 중심으로 본전시와 국가관 전시에 관심이 집중되는 것을 감안 했을 때, 특별전시 개막에 대한 전세계 미술인들의 관심은 이례적이다. 한층 높아진 한국미술의 위상을 실감케 한다. 개막 하루 전날이었던 18일 오후 6시 베니스 몰타기사단 수도원에서 열린 개막행사에는 런던 서펜타인 갤러리의 아트 디렉터 한스 울리히 오브리스트, 휘트니 뮤지엄 관장 스캇 로스코프트, 샤르자 아트 파운데이션의 디렉터 후어 알 카시미, 국립현대미술관 김성희 관장, 이서현 리움미술관 운영위원장을 비롯한 세계 미술계의 영향력 있는 인물들이 대거 모였다. 또한, 영국의 세계적인 조각가 안토니 곰리, 덴마크 아티스트 그룹 슈퍼플렉스, 프랑스의 대표적인 현대미술가 장 미셸 오토니엘 등도 모습을 드러냈다. 뿐만 아니라 곽훈, 강익중, 이형우, 김수자, 문경원, 전준호 등 역대 참여 작가를 비롯하여 김홍희, 김선정, 안소연, 주은지, 윤재갑, 김승덕, 이영철 등 역대 예술감독과 국내 및 해외 미술 관계자 500여명이 모여 베니스의 중심에서 한국미술의 밤을 환하게 밝혔다.

미국 대부호가 뿌린 선의의 씨앗 [이한빛의 미술관 정원]

[뉴시스] 이한빛 미술칼럼니스트 | 2024.04.20

‘내셔널 갤러리 오브 아트’(National Gallery of Art)는 엄밀한 의미의 ‘국립’ 미술관은 아니다. 지금도 국가가 운영자금을 지원하지만 작품 구매와 필요비용은 펀딩을 통해 충당한다. 대부호이자 슈퍼 컬렉터로 꼽히는 미첼 레일즈가 대표직을 맡은 것은 우연이 아니다. 이쯤 되면 궁금해진다. 미국을 대표하는 내셔널 갤러리를 만든 사람은 누구일까. 내셔널 갤러리의 탄생에는 슈퍼 리치이자 컬렉터였고 미국 재무상을 11년간 지낸 앤드류 멜론(1855~1937)이 있다. 그는 앤드류 카네기, 헨리 클레이 프릭, 존. D. 로커펠러 등과 함께 20세기 초 미국 경제의 기틀을 다진 ‘경제 대통령’ 중 하나다. 카네기가 철강 산업을, 프릭이 코크스 산업을, 로커펠러가 석유 산업을 이끌었다면 멜론은 점유한 분야가 없었다. 은행업(‘Mellon National Bank’)을 아버지 대부터 운영하긴 했지만 금융 산업에 헌신했다고 보기는 어렵다. 그럼에도 당시 미국 3위 재벌로 꼽힌다. 그는 은행을 통해 될 만한 사업에 돈을 빌려줘 회사를 설립할 수 있도록 돕고 그 대가로 주식을 받는, 요즘 말로 하면 ‘엔젤 투자자’였다. 대표적인 사례가 피츠버그에 기반한 알루미늄 회사인 ‘알로카’(Aloca)와 글로벌 정유회사인 ‘걸프 오일 컴퍼니’(Gulf Oil Company)다. 이외에도 조선회사인 ‘뉴욕 쉽빌딩 코퍼레이션’(New York Shipbuilding Corporation), 위스키 브랜드인 ‘올드 오버홀트’(Old Overholt), 철도용 차량 제조사 ‘스탠다드 스틸 카 컴퍼니’(Standard Steel Car Company), 화학회사인 ‘코퍼스’(Koppers) 등 19세기 말~20세기 초 미국의 대표 회사들이 멜론의 손을 거쳤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멜론의 전기(‘An American Life, Mellon’)를 쓴 데이비드 카나딘은 “될성부른 떡잎에 투자하고, 그 결실을 나누는 방식으로 다른 사람이 성공하면 본인도 성공하도록 구조를 짰다. 이 비즈니스 방식은 내셔널 갤러리에도 똑같이 적용됐다. 자기 돈을 넣고, 컬렉션을 기부함으로서 다른 사람들의 참여를 유도했다. 본인의 컬렉션을 레버리지 삼아 내셔널 갤러리가 더 훌륭한 컬렉션을 갖추기를 바랐던 것”이라고 평한다. 美 대표 미술관, 그 시작은 인테리어? 은행을 운영할 만큼 부유한 집안의 넷째 아들인 앤드류 멜론은 미술엔 큰 관심이 없었다. 당시의 피츠버그는 번화한 뉴욕이나 트렌드를 이끌던 유럽 도시와 달리 석탄산업 비중이 큰 공업도시였다. 문화 자체를 즐기지 않은 것은 아니었는데 미술보다는 문학과 연극을 좋아했다고 한다. 이런 그가 작품을 처음 산 것은 뒤늦은 결혼 때문이었다. 멜론은 45세에 결혼했는데, 상대는 영국 기네스 맥주회사의 딸로, 불과 20살이었다. 결혼 때문에 미국으로 (그것도 깡촌으로!)이주하게 된 어린 신부를 위해 멜론은 집을 꾸밀 목적으로 컬렉션을 시작한다. 아내가 집에서라도 편안함을 느낄 수 있도록 19세기 프랑스 작가들의 작품을 주로 사들였다. 그러나 결혼이 파경으로 치닫자, 컬렉션을 안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팔아치우기까지 했다. 두번째 컬렉션도 인테리어 데코용이었다. 이번엔 딸을 위한 소비였다. 피츠버그 우드랜드에 좀더 큰 집을 마련한 멜론은 딸을 상류사회에 데뷔시키고 그곳에서 자리잡게 하기 위해 작품을 다시 사들인다. 마찬가지로 풍경화, 여성 초상화 등 자신이 즐기기 위한 용도로 샀을 뿐이다. 세번째 컬렉션은 재무상을 역임하면서 시작한다. 1921년부터 1932년까지 11년을 지냈는데, 세명의 대통령을 연속으로 보좌했다. 워런 G. 하딩, 캘빈 쿨리지, 허버트 후버 대통령이 멜론을 재무상으로 기용한 것이다. 다만 그가 재임 중이던 1929년 대공황이 터졌고, 그 여파로 1932년 사직한다. 그때부터 1년간 미국 대사직을 맡아 영국으로 건너간다. 이때 컬렉션은 워싱턴DC에 있는 자신의 펜트하우스 인테리어용이었다. 집이지만 동시에 공적 공간이기도 한 펜트하우스를 꾸미기 위한 선택은 이전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다만 이 시기 영국 출신 딜러인 조셉 두빈과 본격적인 관계를 맺게 된다. 둘의 첫 만남은 1913년 뉴욕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멜론의 슈퍼 컬렉터 자질을 간파한 두빈이 그를 스토킹하다시피 쫓아다니며 막강한 세일즈를 펼친다. 노련한 사업가인 멜론은 두빈의 제안을 번번이 거절했지만, 그렇다고 쳐내지도 않았다. ‘밀당’ 끝에 두빈은 토마스 로렌스 경의 초상화 ‘레이디 템플턴과 아이’를 25만 달러에 판매했다. 큰 거래가 성사된 것이다. 앤드류 멜론, 역사에 남을 미술관을 만들다 멜론의 마지막 컬렉션 시기는 1930년 이후로 꼽힌다. 그보다 앞선 1926~1928년 사이 그는 건축에 관심을 기울인다. 정확하게는 워싱턴의 재개발과 도시 미화였다. ‘랑팡 플랜’은 오래 전에 미완으로 끝났고, ‘맥밀란 플랜’도 힘을 일어가던 때였다. 멜론의 표현에 따르면 백악관과 의사당 사이는 “주유소, 여관, 중국 세탁소”로 가득했다. 심지어 연방 행정부들이 사무실을 빌리느라 매년 수십만 달러의 세금을 낭비했다. 연방빌딩의 필요성을 잘 알고 있던 멜론은 연방 행정부들이 모여 있는, 이른바 ‘페더럴 트라이앵글’ 구조를 짜는 프로젝트에 착수한다. 이때 프로젝트 안에는 국립미술관인 ‘내셔널 갤러리 오브 아트’도 포함되어 있었다. 두빈은 자신이 멜론에게 내셔널 갤러리의 필요성에 대해서 가장 먼저 일깨웠다고 주장하고(1923), 아들인 폴 멜론은 아버지가 1927년에 들어서야 내셔널 갤러리를 짓겠다고 결심했다고 설명한다. 멜론의 1928년 9월3일 일기에는 “딸이 전화를 걸어 정부에 미술관을 줄 생각이냐고 물었다”고 적혀있다. 시기는 명확치 않지만 멜론은 오래 전부터 국립미술관 건립을 고민했던 것으로 보인다.

베니스비엔날레 한국관 30주년, 대표작 한자리에…정병국 "韓 미술 알릴 기회"

[뉴스1] 김일창 | 2024.04.19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산하 아르코미술관이 기획한 베니스(베네치아)비엔날레 한국관 건립 30주년 특별전시 '모든 섬은 산이다'(Every Island is a Mountain)가 18일(현지시간) 이탈리아 베니스 몰타기사단 수도원에서 개막해 9월 8일까지 이어진다. 이번 전시는 과거·현재·미래, 개인과 공동체, 로컬과 글로벌, 기술과 예술의 경계를 가로지르는 예술적 사유와 실천에 주목하며 지난 30년간 역대 한국관 전시에 참여한 작가 36명(팀)의 작업을 엄선해 선보이면서 한국 동시대 미술의 참모습을 보여준다. 전시 작품은 1995년 개관 당시 선보인 작품 및 최근의 신작을 포함한 총 82점이다. 전시명은 '예술을 통한 시간과 공간의 연결'을 상징한다. 섬과 섬이 마치 산맥처럼 해저 지형과 해양 생태계로 연결되듯 고립된 개인의 삶과 예술이 결국 역사와 사회적 맥락에 연결되어 있음을 은유한다. 이런 주제는 한국관 건립의 산파 역할을 한 고(故) 백남준의 예술철학에 생태적 상상력을 더해 고립된 개인과 분열된 사회를 연결하는 예술의 힘을 보여준다. 문예위 예술기록원 소장자료를 바탕으로 한국관의 지난 30년을 입체적으로 재구성한 '아카이브'로 시작하는 전시는 작은 방이 밀집한 수도원의 실내와 고즈넉한 중정 그리고 탁 트인 야외 정원이 펼쳐지며 베니스의 중세와 한국 동시대의 시간을 서로 중첩한다. 이완의 '커넥서스: 섬 속의 산'과 김윤철의 '스트라타', 제인 진 카이젠의 영상 '수호자들', 김소라의 '얼어붙은 방귀의 싸늘한 냉기', 이주요의 '아웃사이드 더 콤포트 존', 황인기와 문성식, 성낙희의 회화 등은 이번 전시를 통해 처음 공개되는 신작들이다. 또 김수자의 '바늘여인-자오선' 등 다수의 최근작이 동시대 한국미술의 역동성과 다종다양한 스펙트럼을 보여준다. 이밖에 곽훈의 '겁/소리-마르코 폴로가 가져오지 못한 것', 서도호의 '후 엠 위'(Who Am We), 정연두의 '상록타워' 등 역대 한국관 참여 작품이 현재의 관점으로 재연된다. 베니스에 있는 사설 정원 중 최대 규모로 알려진 야외 공간에서는 화합의 메시지와 생태적 상상을 담은 대형 설치 작품이 전시된다. 정병국 위원장은 "이 전시는 최근 세계적인 관심이 높아지고 있는 한국미술에 대해 제대로 알릴 기회가 될 것"이라고, 임근혜 예술감독은 "베니스비엔날레 한국관이 차세대를 위한 예술 실천과 미술 제도의 지속가능성을 탐구하는 글로벌 교류와 연대의 플랫폼으로서 기능하기를 바란다"고 했다.

향 내뿜는 '검은 우스' 인기…한국관 "쉬었다 가세요"[2024 베니스비엔날레]

[뉴시스] 박현주 | 2024.04.18

2024 베니스비엔날레 한국관이 올해는 향으로 유혹하고 있다. 문을 열고 들어서면 은은한 향기와 함께 환한 공간과 마주하게 한다. 텅 빈 것 같은 전시장 속 의식적으로 좁은 문으로 빨리듯 들어가면 그 순간 발길이 멈춰진다. 검은 아기 같기도한 형상이 하늘에서 살포시 내려오는 듯해 눈길을 잡아 끈다. 둥근 아치형의 작은 창문들이 반사하는 빛에 둘러싸인 형상은 2분마다 한번씩 입에서 연기(향)까지 내뿜어 그로데스크한 신비로움까지 조성한다. 이름은 ‘우스(Ousss)’. 한국관 단독 개인전을 연 구정아 세계관의 집합체로, 미지의 세계이자 불가사의한 우주인 동시에 물질이자 에너지다. 인간을 넘어선 몸짓으로 기묘한 감각을 전하는 '우스'는 1998년부터 작가의 작업에 등장했다. 하지만 향 뿜는 우스의 '2분 개인기'는 싱겁기 짝이 없다. 무엇인가 더 있을 것이라는 기대감은 5분도 안돼 깨진다. "이게 다인가?"라며 돌아서는 관람객들은 모른다. 옷 자락에 향기가 따라 붙었다는 것을. 이 전시의 반전이다. 17일 오전 이탈리아 베니스 자르디니 공원에서 개막한 2024 베니스비엔날레는 26개 국가관이 경쟁하며 펼치는 세계 최대 미술 올림픽이다. 본전시 주제와 걸맞게 현란하고 거창하고 복잡한 양상을 띄는 다른 국가관과 달리올해 한국관은 한산한 분위기로 시공간까지 초월한 상태를 보인다. 전시 때마다 길게 줄지어 오픈런을 보이는 영국관, 프랑스관 사이, 구석진 곳에 자리한 한국관은 "올해는 특히 볼게 없다"는 소문이 나고 있다. 오도라마시티(ODORAMA CITIES)를 주제로 한국인의 향을 모아 한국관을 향으로 물들인 구정아 작가는 이런 분위기에 꿀리지 않는 모습이다.

전기톱 작가 김윤신 "이런 순간 상상도 못해…나를 완전히 미술로 내놓겠다"[2024베니스비엔날레]

[뉴시스] 박현주 | 2024.04.18

"이런 순간이 있으리라고는 상상도 못했어요." 90세 전기톱 조각가로 유명한 김윤신 작가가 베니스비엔날레서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17일 이탈리아 베니스 자르디니 공원 본전시관에서 만난 김 작가는 "그동안 작업만 하면서 비엔날레 전시는 생각도 못했는데…이렇게 많은 분들이 축하를 해주고…이제부터가 아니겠어요?"라며 자신감에 찬 '백발의 카리스마'를 보였다. 2024 베니스비엔날레 본전시에 참가해 전기톱으로 썰고 깎아 만든 나무 조각과 대리석(돌)조각을 선보인 김윤신은 휘황찬란한 현대미술작품속에서 정중동 분위기를 연출했다. 전시 입구에서 바로 이어지는 김윤신의 작품은 그냥 지나칠 수 없다. 수많은 회화를 병풍 삼아 전시장 한 가운데에 목조각들이 설치됐다. 김윤신 작가는 "다른 작품들은 현대적이고 미래지향적인데, 나는 거꾸로 돌아간 거 같다"며 "내 작품 속 내용은 원초적이다. 내가 그것을 찾아가지 않았나 싶다. 이젠 나를 완전히 미술을 통해서 내놓겠다"고 했다. "하마터면 놓칠 뻔한 기회였음에도 불구하고 나를 잊지 않고 계속해서 찾아준 예술감독 아드리아노 페드로사(Adriano Pedrosa)에게 고마움을 전한다. 1974년 상파울루 비엔날레 이후로 오로지 작업에만 매진해왔는데, 무려 50년이 지나 이런 크고 중요한 전시에 초대되리라곤 미처 상상도 하지 못했다. 2024년이 내게 큰 행운이 깃든 해인 만큼, 앞으로 더 좋은 작품으로 세상에 응답하고자 한다." 구순의 나이에도 아르헨티나와 한국을 오가며 영원한 이방인을 자처하는 김윤신의 세계관은 '합이합일 분이분일(合二合一 分二分一)'이다. 이번 본 전시에서도 이 연작에 속하는 4점의 나무 조각과 4점의 돌 조각을 선보였다.

가장 늦었지만 가장 아름다운, 환상의 정원 [이한빛의 미술관 정원]

[뉴시스] 이한빛 미술칼럼니스트 | 2024.04.13

‘내셔널 갤러리 오브 아트’(National Gallery of Art)을 관람하다 보면, 잠깐의 쉼이 간절해진다. 그런 관객들이 자연스레 찾는 곳은 바로 조각 정원이다. 가장 나중에 지어진 정원은 구불구불한 산책로가 깔린 작은 공원이다. 코너를 돌 때마다 새로운 작품이 나타난다. 허쉬혼 미술관과 마주보며, 거대한 원형의 분수가 있는 이곳은 관람객들이 가장 사랑하는 장소일지도 모르겠다. 더운 여름엔 시원하게 쏟아지는 분수의 포말이 겨울엔 스케이트장으로 변해 끊임없이 사람들을 초대한다. 작은 카페에서 즐기는 카페인 충전과 과한 단맛이 인상적인 ‘미국식’ 당 충전도 빼놓을 수 없다. 정원 계획은 1964년 처음 가시화했다. 컨스티튜션 7~9번 애비뉴 사이에 국립 조각 정원을 만들자는 대통령 자문회의의 제안에 따라, 미술관 이사회와 국립공원이 협력하기로 한 것이다. 1966년엔 스미스소니언 재단, 내셔널 갤러리, 국립공원 등 3자가 현재 부지에 공원 조성 계획을 발표했다. 원안대로였다면 허쉬혼 미술관과 내셔널 갤러리 사이에 긴 조각공원이 잔디 광장을 가로질러 놓이며 그 너머로 의사당이 보이는 구조였을 텐데, 반대 여론에 밀려 서로 마주보는 형태로 마무리 됐다. 1974년엔 원형 분수가 완공되는데, 같은 해에 원통 모양의 허쉬혼 미술관도 개관한다. 초기 계획이 1960년대에 시작했던 만큼, 조각 정원의 레이아웃은 수차례 바뀌었다. 방향은 관람 편의 강화. 분수대 지름이 약 10피트 줄어들어 보행로를 확보했고, 더위를 피할 수 있는 조경이 더해졌다. 또 설치될 작품이 확정되지 않았기에 언제든 변경이 가능하도록 유동성을 확보했다. 정원에는 21개 소장품과 1개의 장기 대여작까지 총 22점의 작품이 있다. 1999년 오픈 때 다수가 설치됐고, 이후 컬렉션이 추가됐다.

이상한 나라의 뒤죽박죽 감상법 [이한빛의 미술관 정원]

[뉴시스] 이한빛 미술칼럼니스트 | 2024.03.23

반스 파운데이션을 설립한 앨버트 C. 반스(1872~1951)는 의사이자 화학자, 기업가였다. 빈민가를 전전했던, 가난한 집안의 셋째였다. 반스는 의대 졸업생이었으나, 의사가 아닌 화학자로 커리어를 시작했다. 친구와 함께 개발한 질산은 소독제 ‘아르지롤’(Argyrol)을 개발했다. 신생아 실명을 예방하는 소독제로 제품이 크게 성공하자 뉴욕 제약회사 조나이트(Zonite)가 1929년 7월 반스의 회사를 인수했다. 이로부터 약 두달 뒤 대공황이 시작됐으니, 반스는 기가 막힌 타이밍에 엑시트한 셈이다. 반스가 미술품에 관심을 갖기 시작한 것은 1902년으로 전해진다. 약 10년 후인 1912년부터 본격적으로 컬렉터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고등학교 동기이자 화가였던 윌리엄 글라켄스(William Glakens)의 도움으로 프랑스 파리에서 작품을 구매했고, 이때부터 인상파, 후기인상파, 근대 초기 작품들을 차근차근 사들였다. 현재 반스 파운데이션의 소장품은 약 4000여점에 달하는데, 반스가 모두 평생에 걸쳐 소장한 것들이다. 명석한 두뇌와 타고난 사업 감각 덕에 엄청난 부를 일군 반스의 스타일은 미술작품을 대하는 태도에서도 그대로 드러난다. 과학자였던 그는 객관성과 사실에 기반한 분석이 가장 정확하다고 봤고, 미술작품 감상에도 이 같은 접근을 시도했다. 실제 작품을 가까이서 보고, 경험하고, 연구하고, 성찰하는 것이 예술사에 근거한 복잡한 해석보다 우수하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이 같은 결론에는 절친한 친구가 된 철학자이자 교육개혁가인 존 듀이(John Dewey)의 영향도 있었다는 평가다. 반스는 자신의 예술 감상법을 책으로도 냈고(‘The Art in Painting’), 회사 직원들과 날마다 2시간씩 작품 감상하는 시간을 가졌으며, 재단을 설립하고 나서는 교육프로그램까지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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