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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eople"이건희 컬렉션, 돌아온 '아기 업은 소녀'에 로또 맞은 기분"

2021.05.10

[머니투데이] 최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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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엄선미 박수근미술관장 "이건희 회장 기증홀, 따로 만든다"

박수근 화백의 '농악'.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이 박수근 미술관에 기증한 작품 중 하나다. /사진제공=박수근미술관

"로또 맞은 기분이다."

엄선미 박수근미술관장은 고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의 유가족으로부터 박수근 화백의 작품을 기증하겠다는 제안을 듣고 이렇게 생각했다. 엄 관장은 2010년 이 미술관의 큐레이터로 일한 것을 시작으로 11년간 박수근 화백을 알리는 데 앞장 선, 자타공인 박수근 전문가다. 2002년 유화 한 점 없이 문을 연 박수근 미술관에, 이 회장의 소장품이 무려 18점(유화 4점, 드로잉 14점)이나 기증된다는 소식이 기쁘고 감사할 수 밖에 없었다.

박수근 미술관은 6일부터 이 회장의 기증품을 전시하는 특별전 '한가한 봄 날, 고향으로 돌아온 아기 업은 소녀'를 개최하고 있다. 이번 소식에 박 화백의 도시, 양구군도 들뜬 마음을 감추지 못했다. 택시 기사는 박수근 미술관으로 향하는 손님에게 '이건희 컬렉션이 왔다'며 자랑했고, 지역 주민들은 '어디 한 번 보자'며 미술관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이 회장 유족에게 감사하다는 플래카드를 내건 곳도 있다. 양구군에 위치한 박수근 미술관을 찾아 엄 관장을 만났다. 관람객들의 반응, 향후 전시 계획 등을 물었다.

박수근 미술관 전경. /사진=최민지 기자

-기증을 받게된 소감은
▶개인적으로 로또 맞은 기분이다. 양구군으로서도 기쁜 일이다. 온 양구군이 축제분위기다. 사실 우리 미술관의 여건이 많이 열악하다. 군민이 얼마 없다보니 (군청으로부터 오는) 세입도 작다. 그래도 매년 한 작품씩, 드로잉은 10작품씩 구입하곤 했다. 군청도 여러모로 노력해 미술관을 확충했다. 최근엔 국비 지원을 받아 박수근 100주년 기념관도 지었다.

이런 노력들이 기증자에게 중요한 요소였을 것으로 보인다. 기증자 입장에서는 소중한 작품들을 함부로 줄 수 없을 것이다. 마침 (관리가) 잘 되고 있으니 기증을 확정해주시고 흔쾌히 저희도 받을 수 있었다. 앞으로도 기증품들을 잘 관리 할 것이다. 미술관이 하는 역할은 수집, 연구, 전시, 교육, 출판까지 다양하다. 이번 기증품에 대해서도 이런 노력을 할 것이다.

-기증이 발표된 후 주변 반응은
▶주민들이 너무 좋아해주셨다. 외부에서 꼭두새벽에 출발해 오시는 분들도 많지만 지역 주민들도 언론에서 기사를 접하고 '한 번 보자'며 관람하러 오신다. 관심도가 커졌다. 길거리에 기증을 축하하는 플래카드도 붙었다. '이건희 회장님 가족이 국민화가 박수근의 작품을 고향에 돌려주셔서 감사하다'는 취지다. 우리 미술관이 좋은 작품들을 기증 받을 수 있게 된 것은 양구군민과 군청, 미술관의 노력 없이는 불가능했다고 본다. 세금으로 미술품 산다고 했을 때 군민들이 반대하면 못 사는 거다. 그렇지만 이제는 작품을 사면 '너무 잘했다' 칭찬하시며 와서 봐 주시기도 한다. 이런 분위기가 20여년동안 이어져왔다. 그러면서 박수근 선생님은 양구의 자긍심이 됐다. 이번 기증으로 군민들의 자부심도 커질 것이라 생각한다.

-삼성 가와의 인연도 이번 기증에 영향을 미치지 않았을까.
▶우리 미술관 뒷쪽에 자작나무 숲이 있는데, 홍라희 여사님이 2004년 미술관 개관 2주년 행사에 방문했다가 자작나무를 기증했다. 당시 박수근 미술관의 명예 관장이 유홍준 전 문화재청장이었다. 덕분에 개관 행사에 많은 유명인사들이 오고 갔는데 유 청장님이 (홍 여사에게) 숲 조성을 제안했다고 들었다. 뒤로 보이는 군인아파트가 오래됐으니 적당히 가리는 게 좋겠는데, 이걸 숲으로 만들자고 했다. 홍라희 여사님이 그 때 식수를 기증해주셨다.

두 달 여의 논의 꿑에 고향으로 금의환향한 박수근 화백의 작품들
이 회장 유가족 측과의 기증 논의는 올초부터 시작됐다. 두 달 여에 걸친 논의 끝에 4월 중순 쯤 작품들을 받을 수 있었다. 아기 업은 소녀 등은 미술관에서도 수증을 희망하던 작품이었다. 유가족 측은 미술관의 특징과 소장품 등을 고려해 기증품을 결정한 것으로 보인다.

-기증은 언제부터 논의됐나.
▶논의는 2월 말쯤 시작됐다. 작품들이 이곳으로 온 건 4월14일이다. 그 이후 기증에 필요한 서류가 왔다. 3월 중순 쯤에는 기증품 리스트가 확정됐다. 이 때부터 작품별 프로비넌스(provenance·소장 이력) 등을 연구했다. 우리가 준비하고 있는 전시와 더불어 기증의 의미를 어떻게 보여드릴까 고민했다. 유가족들이 기증 후 전시를 바로 개최하는것을 망설일 때 제가 '박수근 선생님처럼 소박하게, 과하지 않게 작품을 보여드리겠다. 빨리 많은 사람들이 봤으면 좋겠다'고 말씀을 드렸더니 흔쾌히 따라주셨다. 이번에 유가족에게 기증받은 지역 미술관 5곳 모두 삼성 측에서 보도자료를 내기 전까지 철저히 기증 여부를 함구했다. 기증자에 대한 예우 차원이었다.

-기증을 하며 특별히 부탁받은 바는 없나.
▶유가족과 직접 대화를 나눌 기회는 없었지만 성심을 다해 일을 진행시켜 주시는 분들이 계셨다. 덕분에 기증품들을 잘 지켜야겠다는 생각이 확고해졌다. 내년 말이나 내후년 초에는 이건희 회장의 기증홀을 따로 만들 예정이다. 유가족 분들께 다시 한 번 경의를 표한다.

아기 업은 소녀. /사진제공=박수근 미술관

-들어온 작품 중 가장 의미있는 작품은
▶하나 같이 다 의미가 있다. 유가족 측은 미술관 소장품 내용을 고려해 기증품을 결정한 듯 하다. 나는 유가족 측에서 어떤 작품을 소장하고 있는지 모르는 상태에서 '빨래터' '절구질하는 여인' '아기 업은 소녀' 등 대표적 유화가 좀 더 들어왔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랬는데, 진짜로 아기 업은 소녀가 올 줄은 생각도 못했다. 절구질하는 여인은 국립현대미술관으로 기증됐는데, 이 또한 의미있다고 생각한다. 제 지도교수님이셨던 유홍준 전 청장님은 '박수근의 작품 중 미술사적으로 가장 의미 있는 작품을 꼽는다면 절구질하는 여인'이라고 말씀하시곤 했다.

-이번에 온 아기 업은 소녀는 왜 특별한가
▶박수근 선생님의 아기 업은 소녀는 총 10점인데, 그 중 2점만이 소녀가 정면을 보고있다. 우리 미술관에 온 건 2점 중 하나다. 정면에서 15도 정도를 틀고있는 소녀인데, 완전히 정면을 보는 그림도 하나 있다. 그 그림 속 소녀는 어리지만 마애불처럼 넉넉하고 푸근한 얼굴을 하고 있다.

-왜 측면이나 후면의 피사체가 많은가
▶박 선생님이 그림을 그릴 땐 카메라가 없던 시절이지 않나. 수시로 노상에서 스케치를 하다보니 자연스럽게 뒤로 돌아있거나 옆을 보는 장면이 많이 포착된 것이다. 박 선생님 작품 속 주인공들은 대부분 앉아있거나 물건을 팔고 기다리는 사람들이다. 그시대가 그랬다. 전쟁 직후라 먹을 것이 없다보니 남자들은 일거리를 기다리느라, 여인들은 대추같은 걸 파느라 장거리에 앉아있었다.
소녀들의 사정도 비슷했다. 어딜 나가도 애 업고 있는 식모살이 소녀를 볼 수 있었다. 박 선생님은 어린 시절부터 어머니 병수발과 동생들 뒷바라지를 했다. 그러다보니 여인들의 애환이나 아픔을 잘 이해하고 계셨다. 아마 연민의 마음을 담아 소녀나 아낙네들을 많이 그린 것이 아닐까 싶다.

-오랜만에 고향으로 돌아와 의미가 큰 작품도 있다.
▶한일은 2003년 뉴욕 크리스티에서 낙찰 받은 프로비넌스가 마지막이다. 그게 우리 미술관에 오게된거다. 당시에 이 회장이 낙찰 받았는 지는 알 수 없다. 다만 박 선생님의 작품이 해외에서 떠돌지 않고 한국으로 왔다는 게 중요한 지점이다.

힘든 지역경제, 죽은 이건희가 살릴 수 있을까

양구군은 박수근 화백의 도시였다. 아파트 벽면 등 도심 곳곳에서 박 화백의 그림을 볼 수 있었다. /사진=최민지 기자

이번 이 회장의 기증은 양구군민들에게도 관심사다. 코로나19(COVID-19)로 힘들어진 지역경제가, 이건희 컬렉션을 보러온 관람객들로 다시 살아날 지도 지켜볼 일이다.

-향후 지역경제 활성화에 도움될까
▶당연히 그렇다고 생각한다. 실제로 미술관 관람객이 늘었다. 컬렉션 기증 발표 전에는 하루 관람객이 98명 정도였다. 발표 이후 1일부터 무료로 사전 오픈을 했는데 많을 때는 300명 가까이 관람객이 몰려왔다. 서울, 경기, 부산, 공주 등 전국 각지에서 와주셨다.

사실 양구에 군 부대 2개 사단이 주둔했는데 최근 1개 사단이 철수했다. 양구군민이 전체 5만명인데 그 중 군인들이 1만5000여명 정도다. 사단이 빠져나가면서 지역 경제가 어려워졌다. 더군다나 코로나19 때문에 지역 축제도 못하는 상황이 되니 소상공인들이 굉장히 힘들었다. 이런 상황에서 이번 기증은 큰 힘이 될 것으로 보인다.

-마지막으로 하고싶은 말은
▶이번 일을 계기로 작품 기증 문화가 좀 더 우리 사회에서 정착됐으면 좋겠다. 기증을 하고도 욕을 먹는 경우도 더러 있지 않은가. 기증자가 기증하기 까지 얼마나 고민했는지 이런 점을 더 알아줘야 한다고 본다. 최근에 이건희 미술관을 짓는다며 지자체들이 나선다는데, 이런 건 오히려 유가족의 뜻에 어긋나게 정치적으로 흘러가는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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