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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orld정치 예술이 경계선을 넘을 때

2019.01.02

[뉴스1] 이원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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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YT터닝포인트]예술가에게는 자신의 경계를 정의할 수 있는 자유가 필요하다.

© 뉴욕타임스

거슬러 올라가면, 정치 예술은 문제가 있지만 근본적으로는 필요한 것으로 간주돼 왔다. 예술을 안락지대 영역의 밖으로 밀어 내고 전 세계 예술가들을 연결해 준다는 점 때문이다.

망명한 예술가로서 나는 때때로 내가 예술의 경계선을 넘어서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의도한 것이 아니라 나의 삶을 규정해온 정치적 현실 때문이다. 하지만 이는 국경선을 다루는 망명 예술가에게만 국한되는 일이 아니다. 예술성과 수익성이 교차될 때나, 예술가가 높은 미학성과 정치적으로 관련되거나, 반대되는 주제 사이에서 균형을 잡기 위해 반대 방향으로 끌려갈 때도 항상 존재하는 것이다.

인종주의와 흑인의 고통을 통해 수익을 얻었다는 이유로 최근 시위대로부터 비판받고 있는 예술가들을 떠올려 보자. 데이나 슈츠의 논란의 작품 '열어놓은 관'(Open Casket), 에멧 틸의 그림, 경찰에 의해 사살된 필란도 카스티야의 여자친구를 묘사한 루크 윌리스 톰슨의 작품 '자화상'(Autoportrait) 등이 이에 포함된다. 분노로 인해어려운 질문이 나온다. 예술이 불쾌하다는 것에 대해 누가 근본적 판단을 내릴 수 있는가? 예술가들은 작품을 대중에 전시할 때 인식에 대한 더 큰 책임을 져야만 하는가?

© 뉴욕타임스

개인적인 경험을 하나 밝히자면, 이집트 혁명의 여파 속에서 카이로 타흐리르 광장 인근에 위치한 현지 예술단체에 임시 스튜디오를 설치한 적이 있다. 나는 혁명 과정에서 자식을 잃은 비극적인 모습의 이집트의 노인 남성과 여성의 슬픈 초상화를 그렸다. 행복한 혁명 뒤에 숨은 인간적 희생을 담아 내고 싶었다. 종종 빈곤해진 공동체에 타격을 주는 희생 말이다.

이 사진전 이후 뉴욕의 라우센버그 재단이 운영하는 갤러리에서 '불타는 우리 집'(Our House Is on Fire)이라는 이름으로 전시회가 열렸다. 이 재단은 직접 이 프로젝트를 시작한 비영리단체였다. 이에 대해 한 비평가는 내가 첼시에 있는 상업용 갤러리들을 상대로 이집트인들의 슬픔을 획책해 궁극적으로 동정심을 유발하고 이윤을 추구했다고 비난했다. 온라인을 통한 판매 수익을 이집트에서 고른 자선단체에 전달했다는 사실은 완전히 망각한 채 말이다.

'불타는 우리 집'에 대한 비평을 읽은 후 나는 그 비평가의 해석과 비난에서 옳은 점이 있는지 되돌아 봤다. 나에게 예술을 위해 사람의 감정을 조작한 죄가 있는 것인가? 아니면 사실을 왜곡하고 자신만의 반(反)예술적 세계관과 정치 어젠다에 따라 곡해한 비평가에게 잘못이 있는 것인가?

하지만 예술은 인적 손실, 갈등, 혹은 비극 속에서도 언제든 존재한다. 예술의 타당성과 적정성을 판단하는 가치 체계 또한 다양하다. 예술의 순수 목적은 혼돈으로부터 본질을 빼내기 위해서 난장판에서 상식을 찾아내는 것이다.

이를테면 세계적으로 유명한 중국의 반체제 예술가 아이웨이웨이(艾未未)는 글로벌 난민위기를 담은 다큐멘터리 영화 '유랑하는 사람들'(Human Flow)을 제작했다. 표면적으로 이 영화는 예술가스스로를 인간적이고 정치적인 재난 중심에 놓았다는 점에서 극찬을 받았지만, 나는 그의 의도·본질·작품이 가져올 충격에 의문이 들었다. 아이웨이웨이는 자신의 명성과 이윤을 위해 인간적 재난을 이용한 것인가? 아니면 그의 작품은 난민 문제에 관심을 끌어올리는 데 일조한 것일까? 그의 청중은 누구이고 그의 작품은 비극적 뉴스와 사진으로 넘쳐나는 이 세계에서 어떻게 차별성을 만들 수 있나?

© 뉴욕타임스

인도주의적 프로젝트에 참여한 다른 작가의 의도를 면밀히 살펴보면서 나는 예술가로서의 나의 진실성에 의문을 제기한 비평가와 내가 다른 점이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또한 망명생활을 하는 예술가에게는 역설이 존재한다는 점을 깨달았다. 공포에 대한 그들의 감정적 반응이 때로는 개인적 경험을 반영하기도 하지만, 반면 이는 특권적 지위에 있게 만드는 예술 경력을 유지하려는 것과 상충하기 때문이다.

그 문제는 패권적 체계 속에 상주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서구의 자유시장 소비주의와 그 문화 생산기계가 예술 관행 전반에 걸쳐 만연한 체계 말이다. 이 체계와 상충하는 것은 개방적이고 포괄적으로 보이기 위해 소외되거나 공모된 것이다. 따라서(고향의 폭정에서 탈출한 용감한 예술가인) 아이웨이웨이와 (억압받는 이란 무슬림 여성 예술가인) 나 같은 예술가의 작품이 정당화되고 관람될 수 있는 것은 렌즈의 필터를 통해서다.

지난 30년 동안 예술의 세계는 더많은 부를 창출하는 대신 분배는 줄여가는 글로벌 경제 이데올로기에 발맞춰 왔던 듯하다. 하지만 이제 종족주의와 국가주의가 부상하고 파시즘이 고개를 드는 가운데 비몽사몽 상태이고 제멋대로 구는 서구 예술 세계가 잠에서 깨어날 수 있을까?

오늘날 우리가 숨을 쉬기 위해서는 정치적으로 깨어 있는 인도주의적 예술이 필요하다. 예술 세계의 헤게모니적 세력이 우리의 모든 행보에 영향을 준다고 하더라도, 우리가 이러한 시간에서 살아남고 끊임없이 반복되는 테러와 인도적 비극을 저지르지 않기 위해 예술이 필요하다. 이 얇은 경계선의 미래를 결정하는 것과 그것이 얼마나 쉽게 뛰어넘어질 수 있는지는 비평가나 시장이 아닌 예술가에게 달렸다.

© 뉴욕타임스

시린 네샤트는 이란 태생 미국인으로, 시각 예술가이자 영화감독이다.


wonjun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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