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트1] 아트1
2015.01.30
[아트1] 아트1
학고재갤러리는 새해 첫 전시로 1월 21일부터 3월 15일까지 백남준 개인전 W3를 개최한다. 이번 전시에서는 2014년 하반기에 열린 항저우 삼상현대미술관 우리가 경탄하는 순간들 展과 학고재상하이 백남준을 상하이에서 만나다 展의 작품을 망라한 총 12점의 작품을 만날 수 있다.
전시 제목인 W3는 미래 미디어 환경을 예측한 작가의 이상적 아이디어가 실현된 그의 대표작이다. 총 64개의 모니터로 구성된 는 인터넷을 지칭하는 World Wide Web을 의미한다. 백남준은 이미 1974년 ‘전자 초 고속도로(Electronic Superhighway)’란 단어를 만들어냄으로써 현대사회의 웹문화와 대중매체를 예견했다. 그 연장선상에 있는 이 작품은 백남준이 꿈꾸던 미래의 미학세계를 대변한다. 그는 일상적이고 권위적인 사물이었던 텔레비전을 예술적인 소재로 탈바꿈하여 관객들의 미적 사유를 촉발했다. 그의 예술을 통해 관람자들은 인간 정신의 자유를 향한 그의 사랑을 체험할 수 있을 것이다.
고(故) 백남준은 최근 세계적 재조명을 받기 시작했다. 2013년 스미소니언미술관(Smithsonian American Art Museum), 2014년 록펠러 재단 아시아소사이어티 (Asia Society of Rockefeller Collection)에서 10여 년 만에 개최된 뉴욕에서의 개인전에 이어 11월부터 영국 테이트모던(Tate Modern)에서 백남준 전시가 열리고 있다. 이런 시기, 학고재가 서울에서 백남준 개인전 W3을 여는 것은 그 의미가 크다. 전시는 국내 관람객에게 한국이 배출한 세계적 거장이자 전설이 되고 있는 작가의 작품을 경험 할 기회를 제공할 것이며 더불어, 미래를 열어갈 우리 작가들에게 큰 영감을 주는 전시가 될 것이다.
백남준(1932-2006)은 플럭서스 운동의 핵심구성원이자 비디오아트의 창시자다. 1932년 서울에서 태어났으며 일본과 독일에서 음악, 철학, 미술사를 공부하고 독일과 뉴욕을 중심으로 활동했다. 비디오, 조각, 설치, 퍼포먼스 등 다양한 경계를 넘나들며 혁신적인 작품으로 세계 현대미술사에 거장으로 자리 잡았다. 그의 작품은 뉴욕현대미술관(The Museum of Modern Art), 스미소니언미술관(The Smithsonian American Art Museum), 파리근대미술관(The Muséed’Art Moderne de la Ville de Paris) 등 세계 유명 미술 기관에 소장되어 있고, 최근 테이트모던에서 9점을 구매하였다.
상하이 현지반응
백남준은 생전에 상하이와 모스크바에서 개인전 열기를 희망하였으나, 그 꿈을 이루지 못하고 타계하였다고 한다. 중국에서의 백남준 개인전은 그의 사후 3년이 되는 2009년 베이징 중앙미술학원미술관에서 처음이었으며, 사후 8년 만에 지난 가을(2014년 9월) 상하이 학고재상하이에서 두 번째로 열렸다. 현지 반응은 매우 뜨거웠다.
중국에서 손꼽히는 독립큐레이터 황두(黃篤)는 “백남준 선생은 우리 모두의 스승이다. 상하이에서 그의 대표작을 만날 수 있다는 것은 영광이다.” 라고 했으며, 중국의 미술 전문 월간지 ‘예술당대’의 쉬커(徐可) 부주간은 “이제까지 상하이 대부분의 갤러리들은 중국 내에서 활동하고 있는 작가들의 전시를 주로 기획해왔다. 백남준과 같은 국제적 명성의 대가의 작품을 상업갤러리에서 전시하는 것은 굉장히 이례적이면서도 고무적인 일이다. 상하이의 미술계와 컬렉터들에게 좋은 영향을 줄 것이라 기대한다.”고 했다. 오프닝에 참석한 독일작가는 자신이 상하이에 머무는 동안 백남준 전시를 볼 수 있게 될 줄은 몰랐다며 “누군가는 하게 될 전시지만, 상하이에서는 오 년에서 십 년 정도 후에나 가능한 일이라 생각했다. 학고재상하이는 용감하다. 감동적인 전시이다. 만약 이 정도 규모의 전시가 독일 쾰른에서 열렸다면 오프닝엔 수많은 사람들이 몰려 작품을 제대로 감상하기도 어려웠을 것이다”라고 말했다.
백남준을 상하이에서 만나다 展은 상하이 모간산로 예술특구가 형성된 이래로 가장 수준 높은 전시였다는 평가와 함께 가장 많은 관객의 기록을 세웠으며 현지미술계로부터 “상하이에 미술 폭탄을 떨어뜨렸다”는 평가를 받았다. 이번 전시는 그 전시의 귀국보고전이다.
덧붙임
1988년부터 30년 가까이 백남준의 작품을 제작, 유지보수 해 온 ‘백남준의 손’으로 불리우는 테크니션 이정성(아트마스터 대표)은 이번 전시의 설치를 마친 후 “백 선생님은 살아생전 상하이에서의 전시를 열망했으나 끝내 이루지 못하였다. 말썽부리던 모니터 몇 대가 무사히 고쳐지고 시간 내에 설치가 제대로 마무리된 걸 보면 아마도 백 선생님이 와 계신 것 같다.”고 말하며 아쉬움과 그리움을 드러냈다.
W3, 1994, 64 monitors, Dimensions variable with specific installations
○ 전시 구성
1. W3
총 64대의 모니터로 구성된 는 인터넷을 지칭하는 World Wide Web을 의미한다. 각각의 모니터는 전체 재생 시간 20분가량의 영상을 일초 간격으로 옆 모니터에 전달한다. 이 반복은 현란한 빛을 뿜으며 역동적으로 x자 형상을 가로지르는 움직임이 되어 나타난다. 이는 현대사회의 역동적인 소통 문화를 암시한 것이다.
현시대의 웹문화와 대중매체를 예견한 이 작품은 계획에서 실현까지 20년이 걸렸다. 작가는 1974년, 록펠러 재단에 ‘전자 초 고속도로(Electronic Superhighway)’라는 이름으로 계획서를 제출하고 제작비용을 신청했지만 1994년이 되어서야 비로소 완성했다.
백남준은 “예술가의 역할은 미래를 사유하는 것”이라고 항상 주장했다. 기술과 미디어를 통해 세계가 소통할 것이라는 미래에 대한 작가의 예리한 통찰력이 표현된 대표작이다.
2. 1963년도 싱글채널비디오
백남준은 1963년, 독일 서부도시 부퍼탈의 파르나스갤러리에서 생에 첫 개인전 음악의 전시, 전자 텔레비전 展을 열었다. 정보전달매체에 불과했던 텔레비전을 예술품으로 변모시킨 대담한 실험정신을 담은 전시회였다. 그는 TV 브라운관을 캔버스 삼아 전자파동으로 화면을 변동시켜 소리를 이미지로 바꾸거나 방송되는 이미지를 왜곡시켜 움직이는 회화를 선보였다. 비록 당시 저명한 비평가조차 텔레비전 수상기가 예술과 관련 있다고 이해하는데 어려움을 겪었지만, 백남준은 이를 통해 비디오아트라는 새로운 장르를 개척하였다.
전시에서 선보이는 5점의 싱글채널 모니터작품은 파르나스갤러리에서의 첫 개인전이 열린 1963년 제작한 것이다. 비디오아트의 아주 초기작으로써 그 의미와 중요성이 크다. 작품은 각각 1점의 A.P(Artist Proof)와 1점의 에디션만이 존재하며 전시작은 모두 A.P이다. 에디션은 현재 리옹현대미술관(프랑스, 리옹)에 소장되어 있다.
참고: 작가의 감독 하에 1995년 비디오플레이어, CD플레이어 사용 등의 기술적인 부분 업그레이드가 이루어졌다.
Sound Wave Input on Two TV Sets (Vertical/Horizontal), 1963-1995, 94x51x51cm
2-1. 두개의 TV 세트에 음파 입력 (수직/수평)
각각의 TV 모니터는 서로 다른 DVD 플레이어에 연결되어 있다. DVD 플레이어에서는 음악이 흘러나오는데 그 전파를 수신한 TV는 전자파동의 강약에 따라 이미지를 움직인다. 관람자들은 소리 없는 음악을 감상하게 된다.
Horizontal Egg Roll TV, 1963-1995, 45x47x50cm
2-2. 수평 달걀 구르기 TV
이 작품은 모니터에서 태아처럼 웅크린 자세의 성인 여성이 달걀 형상 안에 갇혀 허공을 굴러다니는 모습이 재생된다. 평소 동양의 윤회사상에 관심이 많던 백남준이 생성과 소멸의 원리를 달걀 같은 모습으로 표현한 것이다.
작품은 관객의 참여를 통해 화면을 조정할 수 있다. TV 밑에 있는 송신기로 강약을 조절하면 그 전파에 의해 달걀의 모습이 왜곡된다. 관람자가 예술의 주인이며 관람자와 예술은 하나라고 말한 백남준의 예술철학이 잘 드러나는 작품이다.
Vertical Roll TV, 1963-1995, 45x47x50cm
2-3. 수직 구르기 TV
는 작품 속에 담긴 스키 영상을 조작, 화면의 깊이와 시간(빠르기)을 변환하여 보여준다. 가 전파조작에 의해 이미지를 수평으로 왜곡시키는 작품이라면, 는 제목 그대로 이미지를 수직으로 왜곡시키는 작품이다. 영상 송신기의 강약 조절에 따라 흰 설원을 활강하는 스키어는 완만한 하강곡선을 그리기도하고 수직 하강을 하기도 한다. 화면의 깊이와 시간(빠르기)을 조작하는 이 작품은 백남준이 표현 하고자 했던 추상적인 시간이 무엇인지 잘 드러내고 있다.
Foot Switch Experiment on White Rester, 1963-1995, 50x49.5x46.5cm
2-4. 흰 잔재에 대한 발판 스위치 실험
발판을 이용하여 모니터의 이미지를 순간적으로 사라지게 하는 이 작품은 기억의 잔상효과를 시각적으로 쉽게 풀이한 것이다. 동시에, 정지되어 있거나 평면 상태로 저장되지 않는 영상 이미지를 통해 시간과 공간에 대한 일반적인 개념을 비튼다.
Oscilloscope TV, 1964-1995, 21.3x58x45cm
2-5. 오실로스코프 TV
오실로스코프는 교류 신호 전압의 시간적 변화를 브라운관에 비추는 진동 현상을 눈으로 볼 수 있도록 기록 또는 표시하는 장치다. 이 기계를 이용한 작품은 수직, 수평, 대각의 변화를 통해 이미지를 변형 및 이동시킨다.
3. 비디오조각
백남준은 자신의 작품과 삶에 영향을 끼친 여러 방면의 인물들을 로봇작품으로 제작, 오마주하였다. 그를 통해 다양한 분야를 넘나드는 인물들이 영원한 삶을 살게 된 것이다. 가깝게 지내던 요셉 보이스와 샬롯 무어먼, 자신의 뿌리인 징기스칸을 비롯하여 음악가 모차르트, 재즈뮤지션 스콧 조플린(현재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 바우하우스 전시에 설치되어 있음), 의학의 아버지 히포크라테스, 소설가 톨스토이 등이 작품으로 남았다.
Charlotte, 1995, Mixed Media, 236x180x38cm
3-1. 샬롯
독일 플럭서스 운동의 핵심 멤버로써 전위적인 퍼포먼스를 주도하던 백남준은 1964년 현대미술의 메카였던 뉴욕으로 활동영역을 넓힌다. 그곳에서 그는 아방가르드 첼리스트 샬롯 무어만을 만나 오디오, 비디오 그리고 퍼포먼스를 통합한 예술활동을 펼친다. 백남준은 샬롯의 신체를 이용하여 음악과 비디오테크놀로지를 효과적으로 결합할 수 있었으며, 청각과 시각 모두에 있어 성공적인 퍼포먼스를 선보일 수 있었다. 대표적으로 (1964), (1967), (1969), (1971) 등이 있다.
백남준은 인간적인 면을 보다 확장해 사상적 의미까지 내포한 인간형상의 비디오조각을 만들었는데 이 작품은 그녀의 죽음 후 3년 뒤 그녀를 추모하기 위해 특별히 제작되었다. 정 가운데에는 인간 얼굴의 형상인 듯한 첼로가 세워져 있고, 11개의 모니터 화면에서는 샬롯의 퍼포먼스 장면이 재생된다. 백남준은 1991년 그녀의 마지막 퍼포먼스는 그야말로 눈부셨다고 말했다. 그때 그녀는 암 투병의 고통 때문에 모르핀을 투여하고 퍼포먼스를 행하였는데 평소 동양의 샤머니즘에 관심이 많던 백남준은 그 장면을 보고 마치 신들린 무당의 굿판 같다고 회고했다. 원색 계열의 화려한 전선들은 무당이 제의식때 입는 의상을 암시한 듯하다.
Tolstoy, 1995, Mixed Media, 131x86x40cm
3-2. 톨스토이
러시아의 위대한 소설가이자 철학자인 톨스토이는 말년 동양철학에 심취하였다. 그는 장자와 노자의 도가에 특히 관심이 있었으며, 그 사상을 배우기 위해 중국어를 배우기까지 했다. 톨스토이는 당시 러시아의 거장으로 인정을 받고 유럽에서 이름을 날리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새로운 학문에 끊임없이 연구하고 부지런히 자신을 절차탁마하였다.
백남준은 선불교나 도교와 같은 동양철학을 흡수함으로써 서구의 매너리즘과 오만과 대항하고 넘어설 수 있었다. 서구사상에만 치우치지 않고 동양사상까지 연구하며 노년에도 끊임없이 자신을 채찍질한 톨스토이를 바라보는 백남준의 마음이 이에 닿아 있지 않았을까.
Techno Boy ll, 2000, Antique Radios, Antique TVs, Antique Cameras, LCD Monitors, 117x63x46cm
3-3. 테크노보이 II
제2차 세계대전 후 네오다다의 작가들은 오브제에 긍정적인 의미를 부여하였다. 버려진 라디오, 트랜지스터, 카메라와 모니터를 융합해 새롭게 탄생한 테크노보이는 백남준의 해학적인 면모가 잘 드러난다.
또한, 기술과 미디어가 인간을 지배할거란 비관적인 세계관을 무시하고 인간과 기술이 조화롭게 공존하는 이상적 공동체를 보여준다. 기계를 의인화시켜 따뜻한 감성으로 창조된 인간로봇은 기술이 인간을 위협하는 존재가 아니며 우리의 기술과 미디어가 유토피아로 갈 수 있음을 암시한다.
Nostalgia is an Extended Feedback, 1991, Vintage TV Cabinet, Neon, Chassis, Tubes, Laser Printed Canvas, Rug, Print, Lamp, Antique Photo Album, Three 4.5
3-4. 노스탤지어는 피드백의 제곱
'노스탤지어는 피드백의 제곱'은 백남준이 1992년도에 쓴 글의 제목이다. 작가는 과거를 되돌아보면서 품게 되는 노스탤지어(향수(鄕愁))는 단순히 기억을 환기하는 행위와 느낌이 아니라 타인이 우리에게 주는 피드백 못지않은, 혹은 그 피드백보다 훨씬 큰 (제곱근의) 깨달음을 줄 수 있다고 믿었다. 또한, 머릿글에서 ”1950년 이전, 예술가들은 추상적인 공간을 발견했다. 1960년 이후, 비디오 예술가들은 추상적인 시간을 발견했다.”고 말하며 “비디오는 일직선으로 나가는 시간의 화살을 빠르게 하거나 늦출 수 있고, 방향을 뒤바꾸고 뒤집을 수 있으며, 그 흐름을 휘게 하거나 비틀 수도 있다”고 설명한다.
이 글과 맥을 같이하는 동명의 작품 (1991)은 지극히 개인적인 공간일 수도 있는 작은 서재 혹은 다락방을 연상시킨다. 은은한 조명과 오래된 카펫위에 위치한 카메라 로봇(시간 기록 장치), 액자(시간 기록 현상물 보관 장치)와 작가의 기록영상(시간 변환 장치)들을 통해 우리는 과거의 기억을 환기함과 동시에 그 당시의 희로애락을 함께 상기하며 자유롭게 뒤섞인 시간 여행을 할 수 있을 것이다.
Lamp, 1994, Mixed Media, 50x25x33cm
3-5. 램프
는 비디오 아트를 통하여 기술이 환하게 미래를 밝히는 모습을 형상화한 작품이다. 백남준은 원양어선에서 석유를 사용하여 불을 밝히던 램프 안에 조그마한 텔레비전을 넣었다. 과학 기술의 혜택으로 인간은 편리한 생활을 누릴 수 있게 되었다. 이 작품은 기술과 미디어가 인간의 미래를 환하게 밝힐 것이라는 것을 암시한 듯하다. 또한, 비디오 아트가 앞으로 예술세계에 빛을 발하게 될 것 이라는 은유적 표현으로도 해석할 수 있겠다.
Sonatine for a Gold Fish, 1996, Mixed Media, 56x65x49cm
3-6. 금붕어를 위한 소나티네
불교의 선 사상이 담겨 있는 명상적 작품인 금붕어를 위한 소나티네는 1960년대 텔레비전 수상기의 내부 회로를 모두 비워내고 이것을 금붕어의 사적 공간으로 변화시킨 작품이다. 금붕어는 브라운관이 없는 TV 상자 안에서 브라운관을 대신하는 메시지 자체이자 메시지 전달자로 존재한다. 텔레비전의 전자 빛 대신 유유자적하는 금붕어를 통해 관람객은 이것이 실제인지 허구인지 구분을 할 수 없는 특별한 시각적 경험을 하게 된다.
3. 전시 서문
백남준을 상하이에서 만나다
윤재갑 (하우 아트 미술관 관장)
1959년 ‘존 케이지에게 보내는 경의(Hommage a John Cage)’에서 피아노를 부수는 백남준의 퍼포먼스는 본격적인 작가로서 백남준의 첫 무대였을 뿐 만 아니라, 서구 예술계의 매너리즘과 오만을 질타하는 중요한 퍼포먼스였다. 백남준이 활발하게 참여한 플럭서스(Fluxus)의 전성기는 1963년에서 1972년 사이에 걸쳐 있는데, 중요한 것은 이 시기의 한가운데 1968혁명이 놓여 있다는 점이다. 백남준은 1917년의 러시아 혁명이 ‘전기화(electrification)’를 의미한다면 1968 혁명은 ‘전자화(electrofication)’을 의미한다고 단언한다. 백남준에게 있어서 전기 시대가 결국은 빅브라더의 지배로 귀결된다면 전자시대는 그에 대항하는 다중의 비결정적이고 자율적인 저항과 희망을 상징한다. 1984년에 전 세계에 위성 중계된 ‘굿모닝 미스터 오웰(Good Morning Mr. Orwell)’은 빅브라더가 미디어를 통해 인류를 감시하고 통제한다는 조지 오웰(George Orwell)의 암울한 예견이 ‘절반만 맞았고’ 기술의 진보가 인류에게 새로운 희망을 열어줄 것이라는 백남준의 절박한 믿음을 잘 보여준다.
정치-사회-문화적 연대를 통해 마르크스주의적 대안 조직을 꿈꾼 플럭서스의 다른 동료들과는 달리 백남준이 이 ‘전자시대’의 특징인 변동성과 비결정성의 개념을 받아들이고 확장할 수 있었던 것은 동양의 샤머니즘과 선불교(Zen Buddhism)의 영향이 매우 컸다. 백남준에게 있어 선(Zen)은 무엇보다도 상대적인 것을 절대적인 것으로 체험하는 것, 현재를 유토피아로서 체험하는 것이다. 그것은 반(反)아방가르드적이며 반경제적이고 반기독교적이다. 하지만 이 반아방가르드적인 정신이 백남준에서는 아방가르드의 동력으로 기능한다. 이 동력을 토대로 백남준은 서구의 매너리즘과 오만과 대항하고 넘어설 수 있었다. 동양 사상을 통해 아방가르드를 느림과 결합시킬 수 있었고, 기술주의에 함몰되지 않으면서 기술의 인간화를 추구했고, ‘기술에 대항하는 기술로서의 예술’을 자신의 미학적 과제로 설정할 수 있었다.
이번 전시에 나온 중요한 작품 중 하나가 ‘W3’이다. W3은 World Wide Web을 의미하는데 1974년 록펠러 재단(Rockefeller Foundation)에 제작 기금을 신청하고 무려 20년 후인 1994년에야 제작된 작품이다. 1974년에 이미 인터넷을 예상하고 ‘일렉트로닉 슈퍼 하이웨이(Electronic Super Highway)’라고 불렀다고 하니 놀라울 뿐이다. 총 64대의 모니터로 구성된 이 작품은 백남준의 천재성과 그가 꿈꾼 미학 세계를 대변하는 작품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 작품에서 백남준은 동양 사상을 노버트 위너(Norbert Wiener, 1894-1964)의 ‘개연성이 높은 메시지(The more probable the message)’, 맥루한(Marshall McLuhan, 1911-1980)의 ‘차가운 매체(Cool media)’와 결합시킨다. 개연성이 높은 메시지나 차가운 매체는 정보 전달량이 낮아 수신자의 참여도와 관람자에 의해 오히려 완성도가 높아지는데, 이것이 바로 그가 얘기한 비디오 예술의 ‘비결정론적 변동성’이라고 할 수 있다. 이를 통해 백남준이 꿈꾼 미래의 미학은 창조자, 관람객, 비평가가 일체화되어 수많은 존재자들이 발산하는 다양한 정보들을 받아들이고 재조직하면서 미래를 사유하는 것이다. 그의 말을 그대로 옮기자면 ‘자유를 향한 사랑을 진전시키는 것’이다.
1932년 한국에서 태어나서, 홍콩에서 고등학교(Royden School)를 마치고, 일본의 동경대학교에서 미술과 음악사를 전공하고, 독일 프라이부르크 대학에서 미술을, 뮌헨 대학교에서 음악사를 전공하고, 뉴욕에서 생활하며 작업한 백남준은 아시아-유럽-미국을 잇는 최초의 진정한 코스모폴리탄이었다. 유럽과 미국의 동료들은 그와의 협업을 통해 전후 유럽의 암울한 현재를 극복할 대안을 보았고, 자아도취에 빠진 동양의 옥시덴탈리스트(Occidentalist)들에겐 항구적인 자기반성의 척도가 되어왔다. 그것은 21세기인 지금까지도 유효하다. 거의 모든 비평가들이 백남준을 1960년대 이후 가장 도발적이고 혁신적인 작가라는데 동의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을 것이다. 나의 천박한 지식과 재주 없는 글이 부끄럽지만, 나 역시 그를 무한히 존경하는 많은 이들 중 하나일 뿐이다. 살아생전 백남준은 상하이 전시를 열망했으나 끝내 이루지 못 했다. 2006년 뉴욕에서 사망 후 그의 육신은 서울-뮌헨-뉴욕 세 곳에 나뉘어 안장되었다.
제공 | 학고재갤러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