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전시개요
학고재는 2017년 6월 30일부터 7월 30일까지 이진용(1961, 부산) 개인전을 연다. 이진용은 이번 전시에서 2014년부터 작업하고 있는 Type Series (활자 시리즈)와 Hardbacks Series (책 시리즈)의 신작을 보여준다. 아울러 최근 새롭게 시작한 작가의 수집품을 활자와 동일한 방법으로 제작한 Continuum Series (컨티뉴엄 시리즈)도 선보인다.
작가는 작품 공정에 일반인이 상상하기 힘든 양의 노동력을 투여한다. 매일 3시간만 잠을 자며 작품제작에 혼신의 정력을 쏟는다. 작업과정의 공정을 오전과 오후, 오늘과 내일로 배분 하여 다섯 군데의 작업실을 오가며 진행하는 길고 고된 작업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즐거운 놀이처럼 이 일을 수행한다. 작가는 30년이 넘도록 수많은 골동품과 차를 수집하고 있다. 자신의 수집품 중에서 목판활자와 열쇠, 화석, 책 등을 작품 속 소재로 사용한다. 과거의 작가는 누구보다 잘 그리고 누구보다 잘 표현하는 것을 지향했으나 요즈음은 그런 부분을 내려놓았다. 수도승들이 수행을 하듯 작품 하나하나에 반복적 행위와 고도의 집중을 통해 오랜 경험과 사유가 응축된 그만의 성역을 축조하고 있다. 작가는 이번 신작에서 자신의 내면의 입자들을 수직으로 쌓고 수평으로 펼치면서 그것들이 모여 하나의 판이 되고 그 판이 다시 모여 거대한 하나의 문양이 되는 점, 수천 권, 수만 권의 책이 쌓여 또 한 권의 거대한 책이 되는 부분에서 오는 강한 카타르시스를 관람객에게 제공한다.
작가는 2015년 상하이 학고재 전시로 처음 학고재와 인연을 맺었다. 그 전시는 많은 중국 미술인과 컬렉터들에게 큰 반향을 얻었다. 그때 보여준 작업들의 연장선에 있는 작업들을 3년동안 새롭게 준비하여 서울 학고재에서 개인전을 연다. 이번 전시에서 3년이란 시간 동안 축적된 다량의 작업 223점이 공개된다. 한옥건물인 학고재 본관과 어떤 마리아주(mariage)를 만들어 내는지를 감상하는 기회가 될 것이다.
2. 전시주제
수없이 쌓이고 쌓인 시간과 노력의 결과물
Type 시리즈의 제작과정을 따라가보면 작가가 얼마나 노동 집약적 작업을 하고 있는지를 알 수 있다. 작가는 작업과정을 “활자를 배열해서 하나씩 판에 붙인 뒤, 본을 뜬다. 흙과 다른 재료를 섞어서 본에 채운 뒤, 그것을 굳힌다. 항상 다른 비율로 흙과 다른 재료(안료, 염료 등)를 섞기 때문에 각각 작품의 색이 저마다 다르다. 굳힌 판 위에 수성 에폭시를 부은 뒤 말리는데, 처음에는 에폭시가 평평하게 퍼지지만, 흙판이 에폭시를 머금으면서 서서히 스며든다. 20일가량 지난 후에 판 위에 석분을 뿌리고 물로 씻어내고를 반복하는데, 이때 석분을 완전히 씻어내는 것이 아니라 물로 살짝 헹구는 방식으로 여러 번 반복하다 보면 오래되어 먼지가 쌓인 것 같은 질감을 얻게 된다. 어느 정도 오래된 골동품 분위기가 나면 마무리로 손수 광을 낸다.”고 설명 한다. 한 점의 작품이 완성되기까지 이와 같은 여러 공정을 거친다. 이러한 작업 과정을 반복하다 보면 육체적 피로는 물론 엄청난 양의 정신력이 소모된다. 그러나 그것을 통해 작가는 수도승이나 수도사들이 정신수행을 통해 몰아의 경지에 도달하는 것과 같은 정신적 고양감을 즐긴다. 작가는 이 작품들을 조각 그림(Sculpture painting)이라고 명한다.
눈이 아니라 오감으로 바라보아야 하는 이진용의 작업
‘시는 소리 내서 읽어봐야 제 맛을 느낄 수 있고, 우리가 간절히 기도할 때 두 눈을 감듯이, 오히려 눈을 감고 오감으로 느껴야 그의 그림을 제대로 볼 수 있습니다. 형상사유는 마음으로 보는 것이고, 온 몸으로 타자와 사물들의 떨림을 느끼는 것입니다. 이진용 작가가 사물들을 대하거나 작업을 하는 태도도 그렇습니다. 작고 사소한 사물들에 온 정성을 쏟는 것입니다. 온 정성을 다해 화면에 옮겨놓았습니다.’
윤재갑 ”작고 소중한 것들에 대하여” 에서 발췌
절이나 오래된 고택에 있는 문지방이나 정원의 인도에 박혀있는 돌들의 표면을 만져보면 오랜 시간 동안 사람의 발에 밟혀 닳아있는 것을 알 수 있다. 이진용의 작업들을 보면 그런 오래되어 닳아있는 질감을 만져보지 않고 눈으로만 봐도 알 수 있다. 작가가 시각적으로 의도한 효과이다. 이런 작가의 작품이 한 점씩 모여 수십 점이 되고 그 수십 점이 모여서 다시 한 점의 거대한 작품으로 관람객을 마주한다. 작품들은 원형, 정사각형, 직사각형으로 각각 다른 크기와 형태를 띠는데, 가까이 다가가서 바라보면 결국 개개의 활자들이 모여서 만들어낸 하나의 작품인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작가는 이런 경계의 구분을 넘어선 상태를 입자(粒子)라는 단위로 보고 결국 자신의 작업은 크고 작은 입자를 여러 방식으로 표현한 것 일뿐이라고 말한다.
수평과 수직, 수직과 수평으로 교차되는 책들
Hardbacks 시리즈가 기존에 보여온 이미지는 오래된 서적들의 모습을 상상하여 불규칙하게 쌓아둔 모습이었다. 그 과정에서 책의 앞면, 뒷면, 책등 등을 사실적으로 그렸다. 최근 작업은 책의 옆면을 질서정연하게 그려 눈 앞에 보여준다. 가까이에서 자세히 관찰하면 그림이 그려진 재료가 캔버스가 아니라 패널(panel)인 것을 알 수 있다. 기존 작품은 캔버스에 그려왔다면 최근 작품은 ‘조각 그림’이란 작가의 표현처럼 패널에 그려졌다. 패널 위에 세필붓으로 물감을 수없이 반복해서 칠했다. 이런 재료의 변화가 기존 Hardbacks 시리즈에서 보여준 책의 질감을 뛰어넘는 효과를 보여준다.
작품에 근접해서 면밀히 살펴보면 높이나 길이가 2m가 넘는 작품도 사실은 책의 쪽들이 한 장씩 수직 또는 수평으로 그려져 겹겹이 쌓여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작품을 옆에서 바라보면 하나의 긴 패널에 작업한 것이 아니라 4점 혹은 6점씩 짝을 이루어 층층이 쌓은 것임을 알 수 있다. 수평을 쌓아서 수직을 만들고 수직을 나열하여 수평을 만든 것이다.
한국과 영국에서 동시에 진행되는 이진용 개인전
이번 이진용 개인전은 6월 30일에 한국 학고재와 영국 폰톤 갤러리(Pontone Gallery)에서 동시에 열린다. 학고재는 2015년 학고재 상하이에서 열린 이진용 개인전으로 작가와 인연을 맺으면서 노동 집약적이고 아날로그적인 작업을 통한 작품의 완성, 화려한 색채감의 강조가 아닌 은은하고 질박한 색채감을 통한 동양적인 아름다움을 구현하려는 작가의 성향과 학고재가 추구하고 있는 ‘학고창신’의 정신이 통함을 느꼈다. 이진용 작가의 작품은 세계 미술계에서 충분히 경쟁력이 있다고 판단했다.
학고재는 상하이 개인전 이후 작가의 작업을 꾸준히 아트페어와 외국갤러리에 홍보해 왔다. 영국 에서 열릴 이진용 개인전은 서울 학고재와 동일한 일정으로 맞추어 동시에 동서양에서 이진용의 작품이 어떻게 해석되고 읽히는지, 동서양을 불문하고 어떤 공통점이 있는지를 알아볼 수 있는 기회이다. 영국에는 처음 소개되는 이진용 개인전에는 기존에 작업한 Hardbacks 시리즈 11점과 최근 집중적으로 작업하고 있는 Type 시리즈 5점, 총 16점의 작품이 출품된다.
3. 작품설명
기존의 Hardbacks 작업이 작가의 머릿속에 존재하는 가상의 책을 구현한 작업이었다면, 이번 Hardbacks 작업은 여러 겹으로 쌓아 올리거나 나열한 동양과 서양의 서적이 만들어내는 수평과 수직, 수직과 수평의 교차를 표현했다.
동양서적은 수백, 수천 장의 쪽이 수평으로 쌓여 수직을 만들며, 서양서적은 수직으로 모여있는 책의 쪽들이 모여 수평을 만들어 낸다. 작업을 멀리서 보면 하나의 긴 수평선, 수직선이지만 가까이 다가가서 작품을 보면 사실은 수직선이 아니라 수평선이, 수평선이 아니라 수직선이 모여있는 것을 보여준다.
작가는 이런 표현방식을 통해 책의 외형적 틀을 벗어난다. 쪽 하나 하나에 의미를 부여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입자(粒子)로써 바라본다. 그런 입자들이 수직으로 쌓이고, 수평으로 펼쳐져 있는 모습을 통해 관람객에게 시각에 대한 질문을 던진다. 결국 우주는 수직과 수평에 의해 직조된 것임을 느끼게 한다.
기존의 Hardbacks 작업이 작가의 머릿속에 존재하는 가상의 책을 구현한 작업이었다면, 이번 Hardbacks 작업은 여러 겹으로 쌓아 올리거나 나열한 동양과 서양의 서적이 만들어내는 수평과 수직, 수직과 수평의 교차를 표현했다.
동양서적은 수백, 수천 장의 쪽이 수평으로 쌓여 수직을 만들며, 서양서적은 수직으로 모여있는 책의 쪽들이 모여 수평을 만들어 낸다. 작업을 멀리서 보면 하나의 긴 수평선, 수직선이지만 가까이 다가가서 작품을 보면 사실은 수직선이 아니라 수평선이, 수평선이 아니라 수직선이 모여있는 것을 보여준다.
작가는 이런 표현방식을 통해 책의 외형적 틀을 벗어난다. 쪽 하나 하나에 의미를 부여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입자(粒子)로써 바라본다. 그런 입자들이 수직으로 쌓이고, 수평으로 펼쳐져 있는 모습을 통해 관람객에게 시각에 대한 질문을 던진다. 결국 우주는 수직과 수평에 의해 직조된 것임을 느끼게 한다.
이런 방법을 통해 완성된 작품이 땅속에서 꺼낸 화석처럼, 수십 년간 한자리에 있으며 사람의 손때가 탄 나무 손잡이처럼 느껴지는 시간에 대한 착시를 관람객이 경험하게 한다.
Continuum 시리즈는 이번 전시에 처음 소개되는 신작이다. 일본 도쿄 여행 중 골동품점에서 구입한 ‘에도 시대 부엉이 향로’와 독일 퀠른 뮤지엄에서 구입한 ‘빌렌도르프의 비너스’ 모형처럼 작가의 수집품의 외형을 가져온 경우와 30여년의 작가 활동 동안 머물렀던 집과 작업실의 문 열쇠, 해외 골동품점에서 구매한 열쇠처럼 작가활동을 하면서 함께한 시간을 상징하는 물건이 작품의 주제로 등장한다.
Type 시리즈를 통해 작가가 집약된 시간성을 물성으로 표현했다면 이 시리즈를 통해서는 작가로서 보내온 이진용 개인의 시간성을 보여준다.
Continuum 시리즈가 기존 Type 시리즈와 구분되는 특징 중 하나는 작품을 제작하는 과정에서 실제로 땅에 묻어 숙성을 하고 다시 꺼내서 흙을 털어내고 다시 묻는 과정을 수 차례 반복했다는 점이다. 지금의 물건과 시간이 수백 년이 지나면 화석이 되는 것처럼 작가는 자신의 생각과 시간을 ‘셀프 화석’으로 만들어 현재에 구현했다.
4. 전시서문
작고 소중한 것들에 대하여
윤재갑(HOW Art Museum 관장)
문학을 포함하여 모든 예술은 형상사유(形象思惟)를 추구합니다. 아무리 정확한 개념이나 논리로도 형상 자체의 풍부한 내용을 대체하거나 담지 못합니다. 오히려 이론적 틀이 치밀해지고 정확해질수록 사유가 형상을 속박하여 개념화되거나 도식화되기 십상입니다. ‘수학적이며 과학적인 보편타당한 인식의 정초’를 세우려 했던 칸트(Immanuel Kant)에게 수많은 예술학도들이 좌절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보편타당하다고 믿는 과학 이론도 어찌 보면 그 자체가 증명불가일 뿐이고 단지 추측에 지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이런 측면에서 본다면, 태초에 조그만 양자들이 충돌하여 우주가 만들어졌다는 과학 이론은 ‘빛이 있으라 해서 빛이 생겼다’라는 종교적 신념과 하등 다를 바가 없습니다.
칸트의 철학이 인식 주체의 자기불안을 치유하기 위해 ‘이성의 윤리학’을 구축한 것이었다면, 존재하는 모든 타자를 존중하고 그들 간의 평등한 관계를 중시한 스피노자나 루소, 니체, 장자 등은 ‘감성의 윤리학’을 옹호합니다. 이들에게 존재하는 모든 것은 평등합니다. 장자는 ‘나와 나 아닌 것이 더 이상 대립되지 않는 상태가 ‘도’라고 까지 말합니다. 인간과 자연, 나와 너, 감정과 이성이 위계적이지 않고 적대적이지 않습니다. 모든 존재들이 자유롭고 평등하게 소통되는 거대한 관계의 미학을 형성합니다.
예술이 형상사유를 추구한다는 말은 종교의 초월성이나 과학의 보편성과는 달리 피와 살을 가진 ‘감성의 윤리학’과 관계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구체적이고 개별적인 사물들이나 타자의 희노애락과 관계를 맺고 있다는 것입니다. 보편과 초월에 투항하지 않고 세상의 모든 사소하고 작은 것들에게까지 온기를 불어넣어 슬픔은 슬픔대로 기쁨은 기쁨대로 살아있게 만드는 것입니다. 마치 밥솥 안의 밥알들이 한 알 한 알 곧추선 것처럼 말입니다. 우리가 음악이나 시, 그림에서 느끼는 각성이나 전율도 이와 관련이 있습니다.
두 번째로는, 가 위계적이거나 적대적이지 않고, 상호의존적이고 유기적 관계를 형성한다는 의미입니다. 形은 개별 사물의 존재를, 象은 주체가 인식한 개별 사물의 이미지를, 思惟는 형과 상의 상호 추상으로 생긴 보편적 개념을 말합니다. 다시 말해 형상사유는 이 자유롭고 평등하게 내재적이고 완결적인 관계를 형성하고 있다는 의미입니다.
세 번째로는, 회화는 매체의 특성상 형상사유와 가장 직접적으로 관련되어있습니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추상화라고 부르는 것도 결국 인간의 망막에 호소한다는 의미에서는 구상적일 수밖에 없습니다. 서구의 추상화와는 달리 형상회화론에서는 구상과 추상의 구분이 무의미하다는 얘기입니다. 재현의 문제와 관련된 모든 그림에는 구상과 추상이 근본적으로 공존하고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이런 생각들이 제가 이진용 작가를 이해하는 몇 가지 단초들입니다. 그의 작업들을 이런 관점에서 본다면 구상도 아니고 사실주의도 아닙니다. 작가 스스로도 작품 속의 어떤 책도 현실 속의 어떤 책을 보고 그린 게 아니라고 말합니다. 하지만 정작 그의 작업실에는 사방 빼곡히 책이 가득 차 있습니다. 그렇지만 그의 말은 사실입니다. 그는 수많은 책의 체취를 맡고 그것을 그림 속에 옮겨 놓은 것입니다. 시각과 망막에 의존해 그린 게 아니라 오감으로 그린 것입니다. 동양회화론에는 이런 정황을 가장 적절히 설명하는 화론이 있습니다. 사형취상(捨形取象)이라는 것입니다. 말 그대로 사물의 외형을 버리고 내재된 이미지는 취한다는 말입니다. 형태를 버린다는 말은 외형에 집착하지 않는다는 말이지 형태를 완전히 제거한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모든 사물의 형태를 잘게 쪼개고 쪼개서 원, 삼각형, 원기둥으로 환원한 뒤, 선과 색채로만 화면을 채운 서구의 추상회화와는 완전히 다른 생각입니다. 서구식 추상이 보편이 개체를 살해하고 구상과 대립한 것이라면, 사형취상에는 개체와 보편이, 구상과 추상이 평등하고 화목하게 공존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의 작업은 차를 음미하고 향의 체취를 느끼듯이 봐야 합니다. 망막과 시각에만 의존하거나, 구상과 추상의 이분법에 젖은 사람들은 이진용 작가의 일부만 보기 십상입니다. 시는 소리 내서 읽어봐야 제 맛을 느낄 수 있고, 우리가 간절히 기도할 때 두 눈을 감듯이, 오히려 눈을 감고 오감으로 느껴야 그의 그림을 제대로 볼 수 있습니다. 형상사유는 마음으로 보는 것이고, 온 몸으로 타자와 사물들의 떨림을 느끼는 것입니다. 이진용 작가가 사물들을 대하거나 작업을 하는 태도도 그렇습니다. 작고 사소한 사물들에 온 정성을 쏟는 것입니다. 온 정성을 다해 화면에 옮겨놓았습니다. 저 역시 추상과 보편에 내재된 한계와 폭력을 절감하고 있던 터였습니다. 그래서 이진용 선생의 작업들이 더 반갑게 다가옵니다. 이렇게 글로 쓰자니 참 어렵습니다. 부디 저의 글도 이진용 선생의 작업처럼 봐주십시오.
이진용의 활자 시리즈
(해독할 수 없는 문자, 해독을 넘어선 문자, 마음으로 보는 문자, 우주를 이루는 문자)
김순응 : 활자(活字) 시리즈는 조각입니까, 회화입니까. 이 작가는 어려서부터 그림을 그렸지만 작가로서 처음 보여준 작품은 조각이었습니다. 회화를 선보인 것은 2008년으로 기억합니다. 조각과 회화, 추상과 구상을 넘나들다, 최근에는 활자를 소재로 한 작품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진용 : 조각 그림(Sculpture painting)입니다. 만들고 그리는 것이지요. 저는 옛 이집트인들이 상형문자를 돌에 새기듯, 메소포타미아인들이 쐐기문자를 점토에 새기듯, 중국인들이 갑골문자를 거북 껍데기나 소의 뼈에 새기듯, 한자(漢字)를 하나하나 새겨 붙이고 그 위에 물감을 입힙니다. 손으로 더듬어 만족할만한 느낌이 나오고 눈으로 보아 오래된 세월이 드러날 때까지 매만집니다.
조각이든 그림이든 제 작업은 물방울로 바위에 구멍 뚫기입니다. 한 개의 물방울은 미약하지만, 무한 반복 떨어져서 끝내는 바위에 구멍을 냅니다. 제 작업은 반복과 시간으로 완성됩니다.
김순응 : 문자(文字)를 만들고 그리는 뜻이 무엇입니까. 세상에는 많은 문자가 있습니다. 특별히 한자(漢字)여야 하는 이유는 또 무엇입니까.
이진용 : 문(文)은 글과 무늬라는 뜻으로 같이 쓰였습니다. 나중에 무늬(紋)는 떨어져 나옵니다. 문자는 인간이 그리는 무늬 중에 가장 중요한 기호이고 문명(文明)과 문화(文化)는 그 기호의 집합(축적)체입니다. 문자는 본래 그림에서 나왔습니다. 한자는 아직도 그림의 흔적이 남아있는 문자입니다. 그래서 한자는 인종을 불문하고 누구에게나 아름답게 보입니다.
저는 오랫동안 옛날 한자 활자를 수집해왔습니다. 그 활자들을 들여다보면서 인간에 대해 생각했고, 예술, 문명, 우주에 대해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거기서 떠오른, 언어로 옮길 수 없는 무엇들을 사람들에게 전하고 싶었습니다.
김순응 : 이 작가의 문자 작품은 멀리서 보면 무수히 많은 점들의 집합으로 보입니다. 다가가 보면 문자가 모습을 드러냅니다. 다시 멀어지면 문자는 모습을 감추고, 추상화되면서 단지 하나의 구성원으로서의 세포처럼 아득해 집니다. 가까이서의 모습과 멀리서의 모습이 달라집니다.
이진용 : 문자는 태초에 그림에서 나와서 추상화의 과정을 거쳐 오늘날의 형태로 진화하였습니다. 추상화의 극단을 보여주는 것이 0과 1로 이루어진 컴퓨터 언어입니다. 더 이상 추상화 될 수 없는 음(陰)과 양(陽), 유(有)와 무(無), No와 Yes만으로 이루어진 언어가 모여서 조화를 부려 인공지능(AI)을 만듭니다. 저는 어떻게 이런 원소(元素)들이 모여 요술을 부리는 지 궁금합니다.
최초의 추상화가라는 칸딘스키는 “원자가 더 작은 구조로 나누어진다는 것은 내게 있어 세계의 붕괴와도 같았다.”고 말했습니다. 인간의 물리학은 양자역학에까지 이르렀습니다만 누구도 양자역학을 제대로 이해하지도 설명하지도 못합니다.
김순응 : 노자(老子)는 우주를 유무상생(有無相生)으로 파악하고 주역은 음양(陰陽)의 조화로 봅니다.
이진용 : 우주는 무엇입니까. 우주는 셀 수 없이 많은 별들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밤하늘의 별들을 보면 자명합니다. 별들은 어떻게 생겨났을까요. 빅뱅(Big Bang)이론에 따르면 우주는 138억 년 전 바늘 끝처럼 작은 점이 폭발, 팽창하면서 만들어졌다고 합니다. 이때 만들어진 물질들과 에너지가 우주를 만들고 우주를 끊임없이 팽창시키고 있습니다.
빅뱅과 더불어 처음으로 수소원자(H)가 생겨났습니다. 수소는 양성자, 전자가 각각 하나로 이루어진 원자번호 1번의 원자입니다. 인간을 포함한 모든 생명체들도 빅뱅으로 만들어진 원자들이 결합하여 만들어 냈습니다. 별과 인간은 한 몸입니다. 세계의 근원은 물(水, H2O)이라고 말한 최초의 철학자 탈레스(Thales, BC 624-BC 545)의 말이 거의 맞았습니다.
김순응 : 근원은 너무 작아서 인간이 볼 수 없습니다. 인간의 눈은 원자를 볼 수 없고 컴퓨터를 쓰면서도 0과 1이라는 근원은 보이지 않습니다. 지식 속에 존재할 뿐입니다. 지구는 평균 초속 463m(음속 340m)로 자전하고, 초속 29.76km(음속의 87배)로 공전하지만, 인간은 느끼지 못합니다. 우주는 빛의 속도보다 빠르게 팽창하고 있다고 합니다.
우리는 이런 지구 위에서 어지럼증을 느끼지 않습니다. 지구의 자전, 공전, 우주의 팽창은 엄청난 소음을 동반할 터인데 한밤중의 지구는 고요하기 그지없습니다. 인간의 감각은 실제나 본질에 닿지 못합니다.
이진용 : 저는 사물의 본질, 진실을 그리고 싶었는데, 그걸 만질 수도, 볼 수도, 느낄 수도 없었습니다. 저는 만들 수 없는 것을 만들려고 하고 그릴 수 없는 것을 그리려고 했던 것입니다. 인간인 제가 할 수 있는 일은 문자를 들여다보는 것이었습니다. 성경도 문자의 조합이고 팔만대장경도 문자로 이뤄져 있습니다. 하나님은 세상을 말씀으로 지으셨습니다.
김순응 : 노자는 세상은 인간이 보고, 아는 것과 다르다고 하였습니다.
도가도비상도道可道非常道(도가 말해질 수 있으면 진정한 도가 아니고)명가명비상명名可名非常名(이름이 개념화될 수 있으면 진정한 이름이 아니다)
인간이 보고, 말하고, 아는 것은 본질이나 진실이 아니라는 뜻이겠지요.
이진용 : 부처님도 그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범소유상개시허망凡所有相皆是虛妄(무릇 있는바 상(형상)이 다 허망한 것이다)
약견제상비상즉견여래若見諸相非相則見如來(만약 모든 형상을 상 아닌 것으로 볼 것 같으면 그때에 완전한 우주의 밝은 빛인 여래(진실)를 볼 수 있느니라.)
보이는 것이 진실이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김순응 : 우주를 이루는 원자도 에너지도 인간은 볼 수도 만질 수도 느낄 수도 없습니다.
이진용 : 0과 1이 모여서 스스로 학습하고 진화하는 경지는 눈으로 보이지 않습니다. 컴퓨터의 2진법 언어에서 영감을 얻은 해커들(IT)이, 생물의 DNA가 네 가지의 뉴클레오타이드의 조합이라는 점에서, 컴퓨터의 원리와 다를 바 없다는 생각을 가지고 생물학(BIO) 분야에 뛰어들었습니다. 이것은 인문학과 과학의 유희가 아니라 실제입니다.
생물은 세포의 집합이고 뇌는 뉴런 뭉치입니다. 단정 지어 말 할 수는 없겠지만, 이런 작은 것들(원소)이 모여 작동하는 세계가 진실에 가까울 겁니다. 음표를 모아, 베토벤은 ‘운명교향곡’을 만들었고, 모차르트는 ‘플루트 협주곡’을 만들었습니다. 아무리 훌륭한 시(詩)도 언어의 집합일 뿐입니다.
김순응 : 더 이상 쪼갤 수 없는 입자(粒子)들이 만드는 세계를 보여주고 싶은 거군요.
이진용 : 그렇습니다. 조각과 그림을 통해서요. 모든 가능성은 입자들의 조합에서 나옵니다. 신기하지 않은가요? 세상 만물은 원자로 이루어져 있는데, 어떤 것은 별이 되고, 어떤 것은 식물이 되고, 어떤 것은 광물이 되고, 어떤 것은 동물이 되고, 어떤 것은 인간이 되고. 인간은 또 왜 모두 달라야 하는지. 내가 어떤 조화를 통해서 내가 되었는지. 왜 원자는 여럿이 모이면 본래의 모습을 잃고 전혀 다른 것이 되는지.
김순응 : 그러나 원자는 눈에 보이지 않습니다. 인간은 파장이 대략 500 나노미터 이상의 가시광선만 볼 수 있는데, 원자 사이의 간격은 그보다 1000배 정도는 좁습니다. 시각(視覺)되지 않는 것을 시각예술(Visual art)로 표현한다는 것이 가능한가요.
이진용 : 마음은 눈으로 볼 수 없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마음은 각자 다르기 때문에 다르게 보는 것입니다. 다르게 보는 것이 진실입니다. 진실은 사물에 고유한 것이 아니라 인간과의 관계에 의해 비로소 인간의 마음에 존재하는 것입니다. 원효는 “마음이 일어나면 수많은 세계가 생겨나고 마음이 꺼지면 수많은 세계가 사라진다(心生則種種法生, 心滅則種種法滅)”고 했습니다.
인간은 꽃에다 온갖 감정을 들이대지만 사물에게는 감정이 없습니다. 꽃은 슬프지도, 즐겁지도, 괴롭지도 않으며, 심지어는 무심하지도 않습니다. 우리는 짐작조차 할 수 없는 어떤 이유로 그 자리에 있어, 때가 되면 피고, 시들고, 질뿐입니다.
꽃은 실체적, 본질적, 객관적, 보편적인 무엇으로 규정할 수 없습니다. 보는 사람과의 관계 속에서만 존재합니다. 꽃은 각자의 꽃입니다. 내가 부르는 이름 그대로의 꽃만이 꽃입니다. 앞서 우리가 인용한 노자나 부처님의 말씀도 이런 뜻이겠지요.
김순응 : 세계를 실체가 아니라 관계로 인식한다는 말씀이겠지요. 노자의 ‘유무상생(有無相生)’, 주역의 ‘일음일양지위도(一陰一陽之謂道)’ 부처의 ‘색즉시공 공즉시색(色卽是空 空卽是色)’이 모두 같은 뜻이지요. 우주의 존재나 운행의 방식이나 원칙은 관계 속에 존재한다는.
불교의 중심사상인 ‘공(空)’은 ‘물질적인 존재는 서로의 관계 속에서 변화하는 것이므로 현상으로는 있어도 실체, 주체, 자성(自性)으로는 파악할 길이 없다.’는 말씀입니다. 관계론은 양자물리학의 중심 원리이기도 합니다.
이진용 : 현상은 ‘혼돈(Chaos)’입니다. 우주에 단 하나의 물체만 있으면 그 물체는 서 있거나 일정한 속도로 움직이거나 둘 중의 하나입니다. 그러나 하나만 더 있어도 두 물체 사이에 중력이 생겨 움직임이 달라집니다. 달라지겠지만 예측은 가능합니다. 그러나 3개만 되어도 상호관계가 복잡해져 예측이 불가능합니다. 이것이 푸앵카레(Jules-Henri Poincare)가 발견한 카오스현상입니다. 북경에서 나비가 날개를 한 번 펄럭이면 뉴욕에 폭풍이 칠 수 있다는 얘기입니다. 인간은 3이라는 숫자조차 넘지 못합니다.
양자역학에 이르면 우리는 아무것도 확신할 수가 없습니다. 양자물리학에 따르면 하나의 물체가 여기, 저기 동시에 존재합니다. 현상은 관측에 따라 달라집니다. 내가 관측하여 얻은 결과를 제외한 다른 가능성은 모두 우주에서 사라집니다. 나의 우주와 타자의 우주는 다른 세상입니다. 우주는 불확실성의 세계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경험과 지식으로는 이런 세상을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그래서 아인슈타인은 ‘신은 주사위놀이를 하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신은 주사위놀이를 하고 있습니다. 다만 그 룰은 오로지 신만이 알고 있을 뿐입니다.
원자와 에너지의 집합에 불과한 우주는 이렇게 오묘합니다. 카오스도 수학적으로 들여다보면 프랙탈(fractal)이라는 구조가 나타난다고 합니다. 프랙탈이란 아무리 확대해도 그 자신의 모습이 반복되는 원초적인 도형을 말합니다. 눈송이, 허파, 나뭇가지 등이 자연에 존재하는 프랙탈의 전형적인 예입니다. 결국 물질이나 현상은 깊이 들여다보면 아주 작은 것들의 집합으로 이뤄져있습니다.
김순응 : 이 작가가 보여주는 세상의 원자이자 프랙탈은 활자인 셈이겠습니다. 네델란드 화가 에스허르(Maurits Cornelis Escher)의 ‘원형극한IV(Circle Limit IV)’이라는 작품에는 천사와 악마가 프랙탈의 형태로 무한히 엉켜있습니다. 그는 세상을 천사와 악마의 프랙탈로 이뤄진 것으로 파악한 것입니다.
이진용 : 제 활자를 멀리서 혹은 가까이서, 어떻게 관찰하느냐는 관찰자의 마음에 달려있습니다. 제 활자는 기호로서의 의미나 기능을 잃어버린 하나의 입자일 뿐입니다.
저는 그 입자들을 수직으로 쌓고 수평으로 펼칩니다. 쌓고 펼치기를 반복하면 입자들이 어떤 전체를 이루고, 전체는 다시 다른 전체의 출발점이 되고 부분이 되지요. 제 작품은 제가 만드는 빅뱅입니다. 이런 과정을 반복하면서 저는 무언가를 보여주기를 기대합니다. 무언가의 알파와 오메가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무언가의 시작과 끝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제가 추구하는 본질(진실)은 저와 대상과의 관계 속에만 있고, 관람자가 추구하는 진실은 관람자와 제 작품과의 관계 속에만 있을 것입니다. 감상은 주관의 성역(聖域)입니다. 관찰자의 우주 속에서 저는 사라집니다. 관람객의 우주는 오롯이 천상천하유아독존(天上天下唯我獨尊), 관람객의 세계입니다.
(본문에 나오는 노자에 관한 지식은 주로 최진석의 ‘노자의 목소리로 듣는 도덕경’에서, 불교에 관한 지식은 백성욱의 ’금강경 강화‘, 한형조의 ’붓다의 치명적 농담‘에서, 그리고 과학에 관한 지식은 ’김상욱의 과학공부‘에서 인용하였음을 밝혀둡니다. 네 분께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