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전시 평론 ]
눈이 아니다.
압축된 언어를 사용하고 SNS를 끼고 사는 시대의 감수성은 예술의 소비방식에도 많은 변화를 가져왔다. 그림과 시와 소설 보다는 영화와 광고가 시대를 대변하고, 일 초에 몇 번씩 바뀌는 현란한 이미지들은 우리의 삶 속에 스며들어 일상을 그 패턴에 맞춰 익숙하고 길들여지게 한다. 이러한 감각의 바탕을 이루는 기관은 ‘눈’이다. 보는 것이야 말로 이 시대에 가장 중요한 감각의 원천이 되었고, 그 기저에는 “보여야 소비할 수 있다”는 자본의 강령이 자리한다. 어느 글에선가 이러한 시대를 ‘감각의 제국, 기술의 지옥’이라 표현한 적이 있다.
이러한 시대에 캔버스와 오일을 재료로 정서적 충격이나 드러나지 않았던 감각적 증표들을 현실세계에 구축하여 그 체험을 의미 있게 만들고 공유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일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형서점의 구석에는 여전히 종이책 시집(詩集)이 진열되어 있고, 출간되고 있으며, 여전히 수많은 전시회에 수많은 작품들이 선보이고 있다.
노태웅은 현대미술 작품이 어렵다는 선입관을 불식시킨다. 화면을 구축하고 있는 이미지가 고향에 대한 향수와 우리의 자연에 대한 정서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지식과 철학으로 일관되어야 하는 현대미술의 관념이 최소화 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이러한 그의 작품은 타인이나 전문가의 해석이나 평가 혹은 감정을 위탁할 필요가 없다. 그냥 관객이 독자가 마음으로 받아들이면 되는 것이다. 어쩌면 이 글 조차도 그의 작품에 대한 상투적인 해석의 일부일 수밖에 없음을 고백해야겠고, 진정한 작품과의 일체(一體)를 방해하는 사족이 될 수도 있다.
좋은 그림은 시대와 현실을 넘어 유동하는 것이고, 부르지 않아도 돌아볼 수 있는 작품이다. 그러한 작품은 보통 작가의 마음을 담은 ‘진솔한 고백의 언어이며 몸짓’이다. 이러한 고백은 자신을 드러내면서 또한 동시에 자신을 지우고 우리에게 열려 있다. 노태웅의 작품이 가지는 첫 번째 미덕은 바로 이러한 진솔함인데, 그 진솔함이 바탕이 된 작품에서 예기치 않은, 잊어버리고 살았던 감정을 만날 수 있게 한다. 나아가 그 감정이 상투적으로 살지 않으려는 ‘자존(自存)’의 문제를 상기시킬 수 있다면 그의 마음에 아주 조금은 다가선 것이다.
머리가 아니다.
감각과 기술이 바탕인 자본의 제국에서 마음으로 할 수 있는 일은 의외로 드물다. 매뉴얼과 자본의 강제가 우선하고 나를 감싼 주변의 시선이 먼저이기 때문이다. 누가 보고 있을 때 하는 것은 누구나 하는 일이다. 하지만 우리 주변에는 누가 보고 있지 않더라도, 누가 시키지 않더라도 묵묵히 그 것을 해나가는 사람들을 만날 수 있다. 역시 다 마음이 하는 일이다. 그 마음이 숙명이 되고, 그 숙명이 진실이 되고, 그 진실이 나를 사랑할 수 있게 하고, 그 사랑으로 우리는 자유로울 수 있다.
이제까지 우리는 개념과 해석이 현대미술의 정령이라 생각했고 교육 받았다. 이러한 교육적 관념을 가진 세대들에게 노태웅의 작품은 고로할 수 있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이 역시 상투적인 생각이며 마음을 열고 그의 작품에 다가서지 못한 경우이다. 마음으로 그의 화면을 볼 수 있다면 누군가를 부르는 목소리를 들을 수 있고, 부르지 않아도 되돌아보는 나를 마주할 수 있다. 예측을 깨뜨리거나 현란하거나 주목해 달라고 소리치지 않는 그의 작품은 무심하고도 예리한 고독을 들이닥치게 한다. 그 고독의 공간에서 우리는 진심을 토로할 수 있다. 그 공간을 혹은 마음을 요약하거나 해석하기는 나의 능력 밖의 일이며, 그저 마음을 다잡고 다시 다잡을 뿐이다.
그의 작품은 어떤 고백이다. 그 고백을 통해, 그 고백 안에서 미지의 세계를 만나고 자유로워진다. 이때 그의 작품은 해석이 아닌 체험이다. 익명의 사랑 같은 이 매력적인 체험.
다시, 마음이다.
그의 작품은 그와 닮아 정제되고 진중하다. 고도의 사색과 집약된 감정은 미술에 대한 전문적인 지식에 상관없이 공감할 수 있고, 사유할 수 있다. 이러한 배경에는 그의 수도자적인 삶과 고독한 숙명을 지닌 예술가의 붓질이고 그것이 가치 있는 삶을 다져가는 과정이라는 작가의 고백이 함께하기 때문이다.
- 제주 현대미술관 초대전서문에서 발췌
글/ 박준헌(미술이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