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6- )
러시아 동포 3세인 변월룡은 한국인으로서 뚜렷한 정체성을 지닌 인물이다. 농업 유민이었던 변월룡의 조부는 귀화를 거부하고 한국식 이름과 전통을 고수하는 ‘여호(餘戶)'로 살기를 고집했다. 변월룡은 1916년 러시아 연해주에서 유복자로 태어나 경제적으로 어려운 유년기를 보냈다. 일찍이 미술에 재능을 보인 변월룡은 고려인 사회의 재정적 지원을 발판으로 스베르들롭스크(현 예카테린부르크) 미술학교 에서 수학했다. 18세 되던 해인 1937년, 스탈린이 연해주의 한인들을 중앙아시아로 강제 이주시키는 정책을 자행했다. 스베르들롭스크에 머물던 변월룡은 가까스로 이주를 면했으나 가족들 및 고향의 한인들과 약 3년간 상봉하지 못했다. 연해주 유지들이 십시일반 힘을 모아 지원하기로 했던 재정적 도움도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 타향에서 혈혈단신이 된 변월룡은 소수민족으로서의 괄시와 차별을 고스란히 감내했다. 남들보다 출중한 실력만이 스스로를 지키는 일임을 깨닫고 일과 공부에 끈질기게 매진했다. 노력의 결과는 정비례하여 나타났다. 타고난 재능이 뒷받침하기도 했으나 강인한 의지와 집요한 노력에 대한 정당한 보상이었다.
1940년, 변월룡은 탁월한 능력을 인정받아 러시아의 최고 고등교육기관인 레닌그라드(현 상트페테르부르크) 러시아 예술아카데미(현 레핀·회화·조각·건축 예술대학)에 진학했다. 담당 교수가 사비를 털어 보낸 유학이었다. 1947년도, 변월룡은 레핀·회화·조각·건축 예술대학 졸업 작품으로 〈조선의 어부들〉(1947)을 제출하여 수석으로 졸업했다. 1951년도에는 동 대학원에서 소련 미술학 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같은 해 건축 예술부 데생과 조교수로 임명되어 본격적으로 교수 활동을 시작했다. 1953년에 부교수로 승진하면서 북한 교육성 고문관으로 파견되었다. 변월룡은 평양미술대학의 고문 겸 학장으로 재직하며 교육 체계를 바로잡고 학생과 교수들을 지도 및 육성했다. 이듬해 러시아로 돌아가 복직한 이후, 고국으로의 복귀를 평생 희망했으나 이루지 못했다.
1977년도에 레핀·회화·조각·건축 예술대학 정교수로 승진, 1985년에 35년간의 교직 생활을 접고 퇴직했다. 1990년, 74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변월룡은 한국인으로서의 자긍심을 끊임없이 피력했다. 일생 동안 한국 이름을 고수했고 작품에 한글 서명을 남겼으며, 세상을 떠난 뒤 무덤 비석에도 한글로 이름을 새겼다. 사후 미국 플로리다 히벨 미술관의 전시 《골든 브리지 Golden Bridge》(1990)에 작품을 출품했다. 서구에 최초로 작품을 선보인 기록이다. 지난 2016년, 변월룡 탄생 100주년을 기념하여 국립현대미술관(서울)과 제주도립미술관(제주)에서 연이어 회고전을 개최했다. 변월룡을 국내에 처음으로 소개한 전시로 미술계에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국립러시아미술관(상트페테르부르크, 러시아), 국립현대미술관(과천) 등에서 작품을 소장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