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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인/구직 [자하미술관] 허미자<지나가는 바람에 말 걸기> 展 2016.11.1112.04

2016.11.21

Writer : new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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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시 소개글

1
나뭇가지 사이로 바람이 지나간다. 바람은 휘 돌며 머물다가도 이리저리 흩어지기도 한다. 바람은 부드럽게 있는 듯 없는 듯 흐른다. 바람의 결이 안에서 밖으로, 이쪽에서 저쪽으로, 위에서 아래로, 아래서 위로 솟구친다. 나뭇가지는 덩달아 춤을 추고 이파리는 팔랑거린다. 바람의 이미지를 촉각 한다. 대기의 운동이라는 설명은 부족하다. 연분홍, 연노랑, 연푸른 바람의 정서가 흐른다. 오동나무의 얇은 가지와 이파리, 마른 열매와 씨앗들이 흔들리며 바람과 이야기한다. 숨겨져있던 비가시적 세계와 가시적 세계의 경계가 드러난다.

자연(自然)은 숨을 내쉬고 우리는 마신다. 이 ‘자연의 숨’은 말이 될 수도 의미가 될 수도 있다. 사람들은 만물에 이름을 붙이고 의미를 구성하려한다. 바람은 이런 운동의 안과 밖을 자유롭게 넘나든다. 작가의 이미지는 바람에게 말을 건다. 이런 행위는 지속적이고 치열하다. 나뭇가지와 이파리의 형상(形象)은 바람과 만나는 사건을 위한 소박한 재료일 뿐이다. 허미자작가의 그림세계는 구체적 형상과 모호한 형상이 불분명하게 경계를 허물고 있는 어떤 지점에 있다. 이미지가 흔들린다. 바람 속에 들어서면 시각적 형상들은 흐릿해진다.

불그레한 바람의 엷은 그림자(魍魎)가 살랑살랑 불면, 온 몸이 밑으로 쳐지며 마치 고체가 액체로 변하는 과정처럼 흐물흐물 가라않는다. 바람 속에 눈부신 시절의 광휘에 뛰어들 수도 있다. 하염없이 처량한 꿈을 꾸기도 한다. 바람이 떠난 숲은 노래하지 않는다. 숲과 바람의 화음이 그림 속에 풍성하고 즐겁게 담겨지길 바라지만 듬성듬성 나뭇가지와 이파리 몇 개가 흔들리는 것이 남겨진 것들이다. 바람을 따라 지나가버리는 시간의 뒷머리처럼 안타깝게 바라볼 뿐이다. 바람이 남긴 그림자는 분홍빛 괴로움을 던져준다. 까무룩 아득해진다.

2
허미작 작가의 눈은 외부가 아닌 내부를 향한다. 이런 가치의 방향에 집중하는 작가들은 보통 외면으로는 단기간에 특별한 어떤 특징이나 징후를 읽기 쉽지 않다. 오랜 기간 작가 개인의 삶과 창작활동 그리고 흔적과 기록으로 남는 사건들과 작품들이 종합적으로 작용하여 그 작가의 미의식과 창작세계를 파악하게 된다. 이 과정에 기억과 몽상이 이미지와 뒤섞인다.

작가의 이미지는 앞서 요약했듯 감각적으로는 전통적인 채색 도자기를 떠올린다. 수묵화나 약간의 채색이 단촐하게 포함된 담백한 그림들의 정서로 연결된다. 담백하고 소박하며 동시에 오래기간 연륜이 쌓여야 가능한 유려한 감각, 시간과 공간과 작가의 육체적 행위가 눙치듯 어울려 기술적인 면보다는 작가의 정신적인 면을 강조하는 이미지들이다. 작품 속 사물들은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이 어울려 서로 의존해 존재한다.

이런 세계에서는 자연과 예술, 생활과 예술은 한데로 뭉친다. 회화를 감상하는 것은 회화의 오랜 미적 전통을  이미 사라진 시간과 경험들과 함께 보는 것이다. 이러한 바람처럼 지나가버리는 것들을 호출한다. 이런 경험은 특수해서 기계적으로 반복된다거나 첨단 디지털 기술이나 프린터 기술로 어찌할 수 있는 세계는 아니다. 범용한 대중적인 쓰임을 목표로 하지 않는 하나의 세계로 귀결되거나 환원되어 버리는 경험은 회화가 지닌 변치 않는 미덕이다. 작가의 이미지는 새롭거나 신비하거나 또는 유별나거나 특수한 대상을 향하지 않다. 주위에서 얼마든지 보게 되는 나뭇가지와 잎이며 조금이라고 그림을 그려본 사람이면 한 번씩은 경험해본 이미지들이다.

나뭇가지, 이파리, 붉은 색조, 붓터치와 리듬감 등등은 눈으로 확인할 수 있다. 또 그것들이 풍기는 계절의 온도와 습도, 향기와 같은 물질적 몽상을 느낄 수도 있다. 그러나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을 보듯 이런 가시적인 것들이 가리키는 것은 비가시적인 어떤 것이며 우리는 그것들은 ‘바람’으로 은유하는 것이다. 실상 보이지 않는 것들이 주연이고 보이는 것들은 조연인 셈이다.

소재나 이미지나 표현은 너무도 단순하고 소박하며 자연스러워 말하자면 평범 속에 비범이 있는 격이다. 평범 그 자체가 비범인 세계이다. 존재하는 모든 것이 신의 작품이니 아무리 흔하고 평범해도 이미 인위가 도달할 수 없는 세계를 함축하고 있지 않은가. 자연이니 문명이니 문화니 하는 언어와 관념이 도달할 수 없는 또는 굳이 도달할 이유를 찾을 수 없는 경기까지 가보는 것은 정신의 모험가들뿐이다. 이미지를 연금술처럼 주무르고 떡처럼 숙성시켜 정신과 정신이 이미지를 매개로 연결되게 만드는 것은 특별한 일이다. 허미자 작가는 이런 정조(情調)를 타고 흐르는 세계를 본다.

미술평론가 심상용 선생은 허미자 작가의 이전 회화에 대해 이렇게 기술하고 있다. 작가가 지닌 특질 또는 작가가 선택한 회화의 본질에 대한 지향과 그 과정에 나타나는 회화의 어떤 미적 효과 또는 좋은 기능에 대해 기술하고 있다. 그것을 한마디로 회화가 되는 특별한 순간 또는 회화의 자유성으로 표현하고 있다.

회화의 대상이 있기에 예술인 것처럼 예술에서 지향하는 자연이란 순수한 자연 그 자체를 말하는 것은 아니다. 대상이 없다면 세계와 차이 없이 일치하여 작가 개인은 사라지는 경지가 되어 버리기 때문이다. 더 이상 자연을 감각하거나 인식할 주체가 사라져버린다면 자연의 유무를 떠나 더 이상 어떠한 담화도 불가능하니 말이다. 허미자 작가의 회화가 지닌 ‘자연성’이란 인위(人爲)가 극에 달하여 무위(無爲)가 되는 경지와 다르지 않다. 회화의 길이 지향하는 것은 인위와 무위의 경계가 낮아지고 그 사이의 차이와 갈등마저 자연스런 사태로 나아간다.

3
근래 현대미술분야의 인식이 크게 변모하였다. 여자작가들이 약진하는 시대다. 비엔날레를 비롯한 다양한 국제적인 플랫폼 또는 인프라가 확장되면서 여성작가들을 바라보는 시각은 매우 긍정적 방향으로 변하였고 어려운 시기 창작을 놓지 않았던 여성미술가들에 대한 존경과 담론이 급격하게 확대되고 내면화하고 있다.

 

때늦은 감이 있다. 70년대 이후 미대를 졸업한 그 많은 여성작가들 또는 여성 작가지망생들은 모두 어디로 갔는지 궁금할 때가 많았다. 우리 사회에서 이들을 바라보는 시선은 매우 협소했고 부정적이었으며 무엇보다 시대착오적이었다. 흔히 대차다거나 또는 기가 세다는 식으로 번역해왔던 재기발랄하고 용기 있는 여성미술가들이 성장하고 활동하기에 우리의 환경은 메말랐고 적대적이기까지 했다. 남성 미술가들이 창작과 직업으로서 예술가의 길의 어려움을 토로할 때도 여성작가들은 주변부에 머물렀다.

오래전부터 나는 허미자 작가에 대해 더 일찍 주목받아야 할 중견 여성작가들 중 한명으로 생각했다. 이번 자하미술관의 허미자 초대전은 우리 사회와 미술계의 변화 속에 여성미술가의 인식과 지위의 변화를 읽을 수 있는 전시이다. 그간 젊은 또는 신예미술가들에 주목해온 우리 미술계의 상황에서 중견작가들을 주목해야한다는 의견이 지속되어왔고 동시에 중견 여성미술가들에 대한 공정한 평가와 인식의 과제 또한 함께 확산되어 왔다.

작가 허미자는 1984년 첫 개인전 이후 33년간 창작의 붓을 놓지 않고 현대미술의 급격한 변화 속에서도 자신의 취향과 표현을 고수하며 고유한 한국적 정서를 재현하려 노력해왔다. 전형적인 필력을 중심으로 한 붓터치와 드로잉, 마치 철분 안료로 무늬를 채색한 조선 철화도자기처럼 두터운 질감의 칼라로 나뭇가지와 나뭇잎, 여백의 유려한 연출 등은 매우 완숙하고 탁월한 표현을 보여주고 있다.

오랜 시간과 폭넓은 활동 자료를 종합한 해석과 평가를 거쳐야 그 작가의 세계가 온전하게 전면화 된다는 것을 고려해보면 허미자 작가의 작업에 대한 평가가 작가의 화력에 비해 부족하다는 점을 이해할 수 있게 된다. 회화의 본질이나 회화의 의미나 가치 등에 대한 깊은 사유는 쉽게 드러나지 않는다. 아마도 결코 드러나지 않을 수도 있다. 또 그런 경우가 예술세계에서는 더 일반적이다. 미술사를 통해 알려지는 예술가들보다 비교할 수 없이 많은 예술가들이 명멸하며 주위의 공기처럼 존재해왔다는 점을 떠올려보라. 이 익명성. 공식화되지 않은 채 신비한 미지의 영역으로 남는 예술과 예술가들이 얼마나 많은가.
눈에 보이지 않는다고 존재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아주 작은 숨 속에서도 우리는 우주의 운동을 만날 수 있다. 바람은 그저 대기의 운동이 아니다. 바람은 자연의 들숨과 날숨이다. 실재(Reality)의 운동이다. 바람은 작가가 가는 도(道)이다. 바람을 느끼는 것, 바람과 대화를 하는 것은 실재와 공존하는 것이다. 여기서 허미자의 세계는 미국의 시인이자 음악가인 밥 딜런이나 우리나라의 시인이며 음악가인 한대수의 세계와 조우한다. 화가의 몸으로 구현된 새로운 이미지는 새로운 실재와 공감하는 하나의 길을 닦는다. 동시에 이는 미적 환영(幻影)이다. 질료적 또는 물질적 경지를 부지불식간에 뛰어넘는 것이 이미지와 만나는 경험이며 예술적 사건이다. 사람은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고 있는지, 우리는 바람에게 말을 건다.
전시일정

○ 전 시 명: <지나가는 바람에 말 걸기>展
○ 전시기간: 2016년 11월 11일(일) ~ 2016년 12월 4일(일)
○ 오 프 닝: 2016년 11월 11일(일) 5:00pm
○ 전시장소: 자하미술관
○ 전시장르: 회화
○ 참여작가: 허미자
○ 작가와의 대화: 2016년 11월30일(수) 5:00pm


많은 관심과 참여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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