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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시소식[모리스갤러리] 윤예진展 :: Painting

2020.05.29

Writer : new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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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윤예진展 』

 

2020 모리스갤러리 멘토링 프로젝트​ 

 

 

▲ 윤예진, 우호적 관계

116.8x80cm, Oil on Canvas, 2020

 

 

 

 

 

 

 

 

 

전시작가 ▶️ 윤예진(Yun Yeejin)

전시일정 ▶️ 2020. 06. 11 ~ 2020. 06. 24

관람시간 ▶️ Open 10:00 ~ Close 18:00(월요일 휴관)

∽ ∥ ∽

모리스갤러리(Morris Gallery)

대전시 유성구 도룡동 395-21

T. 042-867-7009

www.morrisgallery.co.kr

 

 

 

 

 

 

 

 

 

● 이방인의 감정과 소망

 

★허나영(미술평론)

 

 

인간은 사회 속에서 살아가야한다. 사회 구성원으로 타인들과 함께 살아야한다는 것은 생존의 문제이지 선택사항이 아니다. 코로나19로 인하여 ‘사회적 거리두기’를 하는 때에도, 안전을 위하여 물리적으로 멀어지는 것이지 다양한 방식으로 사회적 관계는 연결이 되어야한다. 그래야 인간은 살아남을 수 있다. 하지만 그 속에서 항상 행복한 것만은 아니다. 때론 나의 욕망 때문에, 어떨 때는 타인의 욕망 때문에 피해자가 되기도 하고 가해자가 되기도 한다. 그래서 서로를 보듬어도 모자라는 시간에 서로에게 상처를 주고, 받는다. 이 과정에서 어떤 이는 지울 수 없는 마음 속 상처인 정신적 외상, 즉 트라우마(trauma)를 갖게 된다. 그리고 그 트라우마를 견딜 수 없어 스스로를 사회에서 소외시켜 이방인(異邦人)이 되기도 한다. 이는 자기방어의 일종일 것이다. 자신을 단단히 무장하지 못한 채로 세상에 나가게 된다면 또 상처를 입게 될 테니 말이다.

 

 

 

 

▲ 윤예진, 비상

40.9x27.3cm, Oil on Canvas, 2020

 

 

 

 

 

 

▲ 윤예진, 미아

33.4x19cm, Oil on Canvas, 2020

 

 

 

 

 

 

▲ 윤예진, Eclipse

72.7x53cm, Oil on Canvas, 2020

 

 

 

 

이방인의 감정

 

사람마다 각기 크고 작은 트라우마를 갖고 있다. 작가 윤예진도 깊은 트라우마가 있음을 고백한다. 이러한 고백은 그림을 통해 간접적으로 드러나고, 작가는 그림을 통해 스스로를 표현하고 치유하고 있다. 윤예진의 작품은 아름답고 투명한 화면 위에 사슴의 얼굴을 한 여인으로 대표된다. 그 여인은 마치 수채화로 표현한 듯 투명한 파스텔 톤의 화면에 나비와 꽃, 풍선과 함께 아름다운 풍경 속에 서 있다. 하지만 주인공으로 보이는 여인은 사슴의 탈을 쓰고 있다. 또한 마른 나뭇가지의 나무와 까마귀, 동물의 뼈 등은 이 화면이 그저 행복한 곳은 아님을 느끼게 한다. 이 모든 것은 이질적이면서도, 묘하게 어우러진다. 현실에서는 함께 있을 수 없는 것들이지만, 화면 속에서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 함께 있다.

 

이렇듯 이질적인 것들의 조합, 이를 통해 윤예진은 이방인의 감정을 표현하고 있다. 이방인의사전적 의미는 다른 나라에서 온 사람이다. 하지만 사회적 의미로는 한 사회에 심리적으로 속하지 못하는 사람을 일컫는다. 이러한 심리는 윤예진이 인상 깊게 읽었다는 에쿠니 가오리의 소설 『반짝반짝 빛나는』에 등장하는 ‘은사자’이야기로 잘 설명된다.

 

소설 속 주인공이 들려주는 은사자는 색소한 희미한 사자이다. 그 다름으로 무리에 어울리지 못하고 어느 샌가 무리를 떠나 자신들끼리 모여 산다고 한다. 하지만 사자임에도 불구하고 초식이기 때문에 오래 살지 못 한다. 사자는 육식 동물이면서 동물의 왕 노릇을 한다. 하지만 은사자는 초식이고 다른 색을 갖고 있기에 결국 무리에 섞이지 못하고 떠나게 되는 것이다. 이 은사자는 분명 이질적인 존재이며 세상에 순응할 수 없는 존재이다. 비록 은빛 갈기가 아름답다 하더라도 말이다.

 

소설 속에서는 이러한 사자의 모습에 일반인인 척 하지만 사실은 동성을 사랑하는 이들, 그리고 알콜 중독으로 사회에 섞이기 힘들어하는 주인공의 모습을 빗댄다. 이들은 은사자처럼 인간의 사회 속에 섞이지 못하고 민낯을 드러내지 못한다. 하지만 일반인과 다름을 서로 알아보고 함께 모여 위로를 한다. 함께 있음에 위로를 받고 서로의 아픔을 이해하려 노력하는 존재들이다. 이들의 외로움은 유리가 깨질 듯 투명하고 맑으며, 은사자의 갈기처럼 서로에게 빛난다. 윤예진의 화면 역시 그렇다. 작가는 분명 유화로 그려졌음에도 마치 엷은 색이 입혀진 유리와 같은 색감과 빛나는 화면을 통해 눈부신 슬픔을 감각적으로 표현한다. 그리고 이 감각을 통해 우리는 작가가 제시하는 이방인의 감정을 느낄 수 있다.

 

 

 

 

 

▲ 윤예진, 우연한 날에

33.4x19cm, Oil on Canvas, 2019

 

 

 

 

 

 

▲ 윤예진, 파도는 밤을 머금고

80.3x60.6cm, Oil on Canvas, 2019

 

 

 

 

 

 

▲ 윤예진, 이방인

116.8x80cm, Oil on Canvas, 2018

 

 

 

 

동화 속 생명

 

투명한 파스텔톤 세계 속에 윤예진은 동물과 소녀, 그리고 풍선 등 언뜻 동화 속에 있을 법한 소재들을 배치한다. 이들은 서로 긴밀한 관계를 갖고 있지 않다. 하지만 서로 공격하지는 않고 그저 서로를 바라보기도 하고 간혹 어깨를 내어주며 온기를 나누기도 한다. 현실과 다른 이 공간은 이 생명들에게 일종의 안식처와 같은 곳일지 모른다. 다른 이들과 다르기에 동화되지 못하는 이 생명들은 현실에서 이방인이지만, 동화와 같은 화면 안에서는 잠시나마 서로에게 기대어 쉴 수 있다.

 

그렇게 그들은 스스로 모여 현실을 소외시키고 있다. 무리에서 나와 자기들끼리 모인 은사자처럼 말이다. 이곳은 오히려 현실 속 사람들이 소외되는 장소이다. 화면 속 세상을 온전히 이해할 수 있는 것은 오직 그 속의 생명들인 것이다. 이러한 화면 속 공간에 대해 윤예진은 현실에서 벗어나 자신들의 세상 속에 살고 있는 이방인들에 대해 일반적으로 몽상가(夢想家)라 부른다는 점을 말하면서, 자신이 표현한 화면은 무의식 속에 존재하는 비현실적 환상으로 낯선 풍경이라 설명한다. 다시 말해 작가 자신의 무의식 세계를 시각적으로 구현한 것이다.

 

하지만 그저 아름답기만 한 곳이 아니다. 그 곳에는 여러 동물들이 등장하며, 죽음을 연상시키는 까마귀와 동물 뼈, 마른 나무가 자리하기 때문이다. 그러면서도 어린 시절의 동심을 드러내는 풍선이 희망을 보여주며, 한없이 가냘프지만 아름다운 영혼을 나비의 모습으로 형상화했다. 이러한 이질적인 환상 공간에 작가자신 일수도 있고 분신일 수도 있는 흰 옷의 여인이 사슴 가면을 쓰고 있다.

 

 

 

 

 

▲ 윤예진, 나의 울음이 닿지 않는 곳으로

53x40.9cm, Oil on Canvas, 2019

 

 

 

 

 

 

▲ 윤예진, 아름다움을 담아내는 일

33.4x19cm, Oil on Canvas, 2019

 

 

 

 

사슴 가면

 

윤예진 작가의 대표적 형상은 사슴얼굴을 한 여성의 모습이다. 몸은 가느다란 팔과 다리를 가진 여성이지만, 얼굴이 있어야할 위치에는 어떠한 표정도 없는 수사슴의 얼굴이 대신하고 있다. 마치 켄타우로스의 역상(逆狀)인 듯 하기도 하지만, 실은 수사슴의 가면을 쓰고 있는 여인의 모습이다. 그래서 그 크고 맑은 눈망울은 초점이 없고, 얼굴엔 어떠한 미세한 움직임도 없다. 그저 가만히 응시할 뿐이다. 그리고 수사슴의 눈망울을 보던 우리는 문득 가면 뒤의 여인이 있음을 알아차리는 순간, 그 여인이 우리를 바라보고 있음을 깨닫게 된다. 이를 통해 생경한 시선의 경험을 하게 한다. 사슴을 바라보는 주체에서, 사슴 가면 뒤 여인에게 보이는 대상으로 뒤바뀌는 순간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왜 이 여인은 가면을 쓰고 있을까. 그것도 수사슴의 얼굴 가면을 말이다.

 

가면을 쓴다는 것은 나를 숨기는 역할을 하기도 하지만, 반대로 자아와는 다른 모습으로 자신을 방어할 수도 있다. 만약 작가가 말하듯, 한 사회에서 이방인과 같은 모습이라면, 육식 사자들 사이에 있는 초식 은사자라면 어떤 가면을 써야할까. 그건 분명 무리의 다른 이들과 같은 모습 혹은 그들이 ‘기대하는 모습’이어야할 것이다. 나의 본 모습을 숨기고 만들어낸 또 다른 모습을 쓰고 그 모습인 척 연기를 해야하는 ‘페르소나(persona)’인 것이다.

 

윤예진의 사회적 가면, 즉 페르소나는 수사슴의 모습을 하고 있다. 수사슴은 맑은 눈동자를 가지고 있는 초식동물이다. 그래서 많은 이들이 경계보다는 사랑하는 동물이면서도 멋진 뿔을 가지고 있어서 동경의 대상이기도 하다. 작가 윤예진은 자신과 닮지 않았지만, 사회에 대신 보여주면서 자신을 보호할 수 있는 페르소나로 수사슴을 택했다. 그렇지만 수사슴의 얼굴은 우리와 진솔하게 대화하지 못한다. 그저 가면을 두고 서로를 바라보기만 할 뿐이다. 결국 이방인도 한 사회의 일원이 되고자 한다.

 

“저는 이곳에서 제가 늘 이방인이고 여러분과는 아무런 상관도 없다고 생각했어요. 하지만 겪을 만큼 겪고 보니 제가 원하든 원하지 않든 제가 여기 사람이라는 걸 알겠습니다. 이 사건은 우리 모두의 일입니다.” - 알베르 카뮈, 『페스트』, 최윤주 역(열린책들, 2019) 중

 

최근 코로나19 상황으로 인해 많은 이들이 관심을 갖게 된 카뮈의 『페스트』 에는 이런 말이 나온다. 어쩌다 페스트 상황에서 오랑에 갇히게 된 이방인인 랑베르가 의사 리유에게 한 말이다. 랑베르는 페스트가 처음 퍼지자 어떻게든 벗어나 자신의 연인이 있는 파리로 가고자 한다. 하지만 이내 많은 사람들이 페스트의 상황을 극복하고자 노력하는 모습을 보고 돕게 되고, 결국은 함께 남겠다고 한다. 비록 자신은 돌 곳이 있는 이방인이지만, 같은 시기와 공간에서 동일한 사건을 겪었기에 ‘여기 사람’이라 생각했다.

 

일반적으로 다른 지역 출신의 사람 혹은 다른 정체성을 가진 사람을 이방인이라 여긴다. 하지만 랑베르처럼 이방인의 정체성을 가져도 같은 장소와 시기에 있기에 사회의 일원이 될 수 있지 않을까. 그렇게 자신의 삶을 만들어나가고, 언젠가는 모든 것을 극복하고 가면을 벗은 모습으로 사회 속에 나 수 있는 때가 올 것이기 때문이다.

 

윤예진 작가가 만들어낸 환상의 공간은 현실과 다른 이방인들의 세계이다. 그럼에도 이들은 화면 밖의 우리를 바라보고 있다. 이러한 시선은 현실 속 사람들이 그 공간에 대한 관심을 갖게 하는 동시에, 언젠가 그 공간 속 생명들이 우리와 함께 할 수 있을 것이란 소망을 갖게 한다. 각자 마음 속 은사자들이 모여 함께 무리를 이루고 치유할 수 있는 시기가 올 때를 기다리며 말이다.

 

 

 

 

 

▲ 윤예진, 네가 울지 않길 바란다

53.0x40.9cm, Oil on Canvas, 2018

 

 

 

 

 

 

▲ 윤예진, 온실 속 공상

116.8x80.3cm, Oil on Canvas, 2018

 

 

 

 

 

 

▲ 윤예진, 아침과 밤보다 낯선

162.2x130.3cm, Oil on Canvas, 2016

 

 

 

 

자아의 상실로 인한 무의식 속

죽음의 욕망에 대하여

 

- 이방인들 -

 

윤예진

 

수많은 사람들과 어울러 살아가는 현대 사회에서 하나의 바람직한 구성원이 되기 위해 자신의 욕구와 충동을 억압하며 타인의 말과 행동에 순응하는 삶은 동시에 이 규율에서 어긋한 행동을 할 경우 언젠가 도태되지 모른다는 두려움과 함께 강박감으로 내면에 자리 잡게 된다. 이로 인한 정신적 동요 속에서 쫒기 듯 만들어진 허구의 모습은 본래의 자신의 존재에 대한 의문을 가지게 하여, 결국 본인이 진정 원하는 것이 무언인지 어떤 방향으로 나아가야 하는 것인 지 길을 잃은 채 욕구와 절제 사이의 혼란을 빚어낸다.

 

사회적 동물인 인간이 자신이 속한 집단의 규율을 따르는 것은 암묵적인 동의 아래 이루어지는 이치이나, 규정된 삶 속에서 무의식적으로 피어나는 자유로운 표현의 욕구와 충동 따위가 본능적인 것 임에도 불구하고 무척 낯설게 느껴지게 되는 현상은 자신의 주체성과 자아의 확립에 있어 혼란을 빚어낸다는 사실을 무시할 수 없었다. 타인의 시선 속에서 내면에 묻혀버린 채 표출되지 못한 감정들은 이내 자신을 병들게 만들고, 이는 지속적인 우울감. 즉 멜랑콜리아의 탄생을 의미한다. 본인은 개인적인 과거 트라우마의 각성과 더불어 우울한 시대 속 표류하는 하나의 멜랑콜리아로서 이러한 현상에 의해 자아를 상실하고 무의식 세계로 빠져든 사람들을 평온한 죽음의 안식을 찾아 부유하는 이방인이자 몽상가라 표현하였다.

 

작품 속 이방인들은 부당한 사회 현상에 좌절하고 절망하지만 직접적으로 맞서 싸우지 않는다. 철저히 현실을 외면하고 부정하며 사회가 요구하는 온순하고 유약해 보이는 모습을 지닌 사슴의 탈을 뒤집어씀으로서 스스로를 감추고 동일시 한 모습으로 드러내고 있다. 때문에 작품은 잿빛 색채를 머금은 투명하고 맑은 수채화와 같은 기법을 이용하여 진실을 감추고 더욱 동화적이고 아름다운 느낌을 극대화하여 이질적인 감정을 불러일으키고자 하였다. 그러나 캔버스 너머 무언가를 또렷이 응시하고 있는 사슴의 눈동자에는 조용히 들끓는 분노와, 환희에 가까운 모호한 감정이 잠재되어있으며 이는 진취적으로 모든 생명의 끝에 주어진 죽음을 쟁취하겠다는 강렬한 소망과 의지, 그리고 그 유한한 삶에 존재하는 의미를 찾는 신호가 된다.

 

자신의 모습을 잃어버린 채 방황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의 깊은 불안과 무기력함, 우울한 감정들을 정적인 모습으로서 구성하고, 동시에 본래의 자신을 잃지 않기 위한 기록의 과정이자, 혼란한 사회 속 누군가의 외로움에 공감할 수 있는 치유의 기능을 담아내고자 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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