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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시소식[아트스페이스 엣] 모두로부터 이곳까지

2018.08.10

Writer : new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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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두로부터 이곳까지

2018/08/03 ▶ 2018/08/15

아트스페이스 엣

 

주최   아트스페이스 엣

참여작가   이유지, 신혜진, 장예슬

문의   02-543-0921

홈페이지   www.artspaceat.com/

 

전시명   모두로부터 이곳까지

전시기간   2018.08.03(금) ~ 2018.08.15(수)

전시시간   오후 1시 ~ 오후 6시 / 매주 월요일 휴관

장소   artspace at / (06024)서울특별시 강남구 신사동 627-27 B1

 

 

 

전 시 소 개

 

1) 기획자의 말

그림을 보여드리려고 합니다. 평면 위에서의 몸짓과 시간, 머물고 떠나간 흔적을 보여드리려고 합니다. 이를 위해 작가들이 자신만의 ‘상’을 맺기 위해 이어온 시간과 그곳에 스며있는 흔적을 모았습니다. 그들은 느끼고 겪으며 모아모아온 작은 흔적들을 큰 자국으로 바꾸어 냈습니다. 희미한 흔적 속에 머물고 떠나오며 남긴 그들의 자국을 보여드리려고 합니다. 작은 것으로부터 큰 것 까지, 옅은 곳으로부터 짙은 곳 까지. 그들이 살아온 모두가 담겨있는 지금의 이곳을 보여드리려고 합니다. 

 

 

2) 전시담론

모두로부터 이곳까지 Animato 생기 있게, Con sentimento 감정을 갖고

이주희

 

작업을 한다는 것은 작업으로 남겨질 것을 결정해 나가는 과정이기도 하다. 과정은 세상의 어떤 하나가 되었거나 혹은 아무것도 되지 못한 것과 대면하는 일이기도 하고 남겨질 수 있는 것과 남겨질 수 없는 것 사이에서 미묘함을 느끼는 일이기도 하며 그중의 어떤 순간을 결정해 덜어놓는 일에 매진하는 일이기도 하다. 이러한 업의 반복과 심화 혹은 일정구간의 정체 등의 사건으로 순간과 매일이 지나갈 텐데 작가란 어쩌면 이러한 사건들 속을 지나다니는 사람을 일컫는지도 모른다. 

 

이곳저곳을 지나다니게 되는 것이 삶이다. 이쪽의 삶이 있고 저쪽의 삶도 있고 어떤 때엔 이쪽에 시선을 두다가 어떤 때엔 저쪽으로 자연스럽게 주의가 기울어지는 삶도 있다. 그러한 시간과 공간, 그것들의 주변 혹은 그것들의 내외를 드나들며 드나듦의 흔적을 온몸으로 받아내는 것이 살아간다는 것의 작은 의미다. 그런 것이 아니라면 어떤 곳은 덜어낸 삶도 있다. 어딘가는 쓰라리고 어딘가는 여전히 가슴 벅찬 기억이지만 무엇과 어울리지 못하게 되어 덜어내 버린 삶도 있다. 그 모두로부터 이곳까지 왔지만 이곳은 또다시 어디론가 지나가야 하는 곳이기에 모든 가능성으로서 살아있는 것이 지금 우리의 삶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예술가란 모든 가능성중에서도 표현을 위해 살아가는 이들이다. 표현은 그들의 의지이자 업으로서 삶의 어느 쪽에 위치해 있기도 하지만 삶 전체를 담아낸 것이기도 하다. 그렇기 때문에 표현을 위해 심신을 움직이는 것은 예술가들의 삶 전체를 움직이는 것이며 그 동력이 되는 생기를 발하는 것이다. 나의 생기를 발하면서 세상의 여러 생기를 받아들이는 것. 거기에 감정을 더해 자신의 인상을 만들고 삶의 여러 순간마다 부지런히 반응하는 일. 그러한 표현. 표현을 위한 심화. 그것의 반복. 그렇게 새로운 표현을 만들어 낼 수 있다는 가능성 그 “하나가 움직이는 가운데 무언가 낳고 무언가 이루어지면서 결이 생긴다.”(장자, 天地 中) 

 

결, 결을 이야기 한다는 것은 무엇이 어떻게 움직여 왔으며 그 가운데 무엇을 낳았고 무엇을 이루어 왔는지에 대하여 이야기 하는 것이다. 또한 지금까지의 삶과 앞으로의 삶이 마주한 지금을 드러내는 것이기도 하다. 결은 삶을 위한 내적인 다스림을 외현에 이를 수 있도록 가꾸고 자라게 하면서 드러난다. 그러한 결을 시각적으로 표현한다는 것은 전형적인 표상의 한계를 넘어 표현을 위한 사고와 외연을 확장하는 것이며 곧 자신이자 인간을 가꾸는 일이다. 보다 적극적으로 세계를 수용하고 그것의 표면을 지나 표면의 근간을 들추어 보는 일이며 나의 근간까지도 하나의 미적 표현으로 바꾸어내기 위해 생기와 감정을 운영하는 일이다. 이같은 예술이 단순한 모방이 아니라면, 어떤 그리기가 쌓여있는 시간과 먼저 얻은 기호를 관찰하고 익혀 베껴내는 수준의 것이 아니라면 그러한 그리기를 위해 수없이 시도하고 고민하는 이들을 예술가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하나의 사와 흐름을 포착하는 것으로 빠르게 결과물을 내는 것 보다 아득하거나 없는 것을 시도하고 감지해 결정으로 옮겨내는 가운데 자국은 짙게 남는다. 작가가 자신의 삶 속에서 찾아낸 작은 자국이 소중한 획이 되고 그것들이 차곡차곡 쌓여 예술로서 남는 것이다.

 

신혜진·이유지·장예슬의 작업에서 동질의 결이 느껴진다면 그것은 그들이 의상(意象)을 그리고 있기 때문이다. 의상을 그리는 것은 마음과 마음의 울림, 그것들이 가고자 하는 길과 그것을 향하는 의지를 그리는 일이다. 또한 한 인간의 내면에 작용하는 여러 생기들을 운영해 내는 일이며 감정을 담은 조형이 뒤따르는 자신의 자연을 만들어가는 업이다. 이러한 자연의 여러 모습을 보여나가는 것으로 이들의 예술은 피고진다. 그들의 작업은 관능적이다. 그들의 관능은 본래의 어떤 성질, 그들의 본능을 건드는 것을 드러낸다. 가장 크고 작은 것, 가장 짙고 옅은 것, 있고 없는 것 들을 내어놓는 것이 그들의 작업이다. 그렇기 때문에 작품과 함께 표현에 작용하는 하는 생기와 감정의 전반이 함께 제시되고 시지각적 인지와 더불어 복합적인 인지를 가능하게 한다. 스스로 그러한 것이 자연이지만 자연은 스스로의 모습과 더불어 주변과의 조화로 생명을 키워 나간다. 의상으로서 표현해낼 것이 무엇인지를 들여다보는 일은 작가의 성찰과 맞물려 있다. 하지만 의상을 그린다는 것은 결국 자신과 바깥 모두를 두루 살펴야하는 것이다. 그 모두로부터 이곳까지, 생기 있게, 감정을 가지고, 그것이 그들의 작업이며 삶이다.

 

 

3) 작가소개

신혜진은 자연을 그린다. 작은 자연에서 시작된 그의 그림은 점점 큰 자연으로 시선을 옮겨오고 있다. 해와 달, 산과 강, 바다와 숲 등은 살아서 관계하는 자연이다. 작가는 하나의 자연을 받아들임으로서 자신과의 새로운 관계를 찾고 그 안의 소우주를 유추해 나간다. 꾸준히 자연을 들여다보며 단상을 옮겨온 그의 화면에는 생명의 기운이자 군락이 담겨있다. 최근엔 그것에 자신의 획을 더한 화면을 보이고 있다. 자연을 따르고 자연에 귀 기울이는 대순(大順)의 연장에서 진경을 미로서 받아들인 작가이다. 그렇기 때문에 자연에 획을 더한다는 것은 더욱 적극적으로 자연과 관계하고 거기서 파생되는 연(緣)을 수용하려는 태도로 볼 수 있다. 자연의 모습이 그러하듯 화면 곳곳에서는 획이 피고 쏟아진다. 또한 색면의 경계에서 뻗어나가는 갈필로 인해 색면의 기원이 된 것들이 더욱 도드라진다. 도드라진 것은 형상뿐만 아니라 기원의 기운이며 그것을 목격한 자신일 것이다. 기운을 부추기는 획이자 그것을 긋는 자로서 생기를 이어나가는 것이 신혜진의 작업이다.

 

이유지는 바람을 그린다. 지금까지 작가에게서 찾을 수 있었던 것은 껍질, 타래, 고치처럼 얇은 것들이 모이고 겹친 방어기제의 형상이었다. 그러던 것이 최근에는 풀어지는 수순을 거치며 풀린 것들이 어디론가 뻗어나가 작가의 바람을 향하고 있다. 그러한 바람은 애도, 재배, 달아나기, 숲 등의 형상이 되었으며 완전치 못한 감정을 다독이고 자라게 하는 과정이 이유지의 작업이었다. 그의 화면에서 색색의 얇은 선은 한 편에서 다른 편으로 향하며 직선과 곡선을 포함한 뻗침을 보이기에 동적이고 살아 있는 것처럼 보인다. 식물처럼 보이는 실루엣은 그것이 앞으로 더욱 살아날 생명이며 큰 그늘을 드리워 주변과 함께 자라날 수 있는 것임을 나타낸다. 〈루시드 드림〉에서 실버들처럼 드리워진 작가 본연의 표현은 수면에 반사되어 몽환적으로 빛난다. 하지만 수면아래의 영역은 여전히 꿈과도 어울리기 힘든 곳으로 앞으로 작가가 풀어가야 할 심연의 영역이기도 하다. 여러 이야기를 한 화면에 담기 시작하며 작가는 새로운 길에 접어들었다. 여전히 어려운 이야기를 한 올 한 올 소중히 풀어나가는 것이 이유지의 작업이다.

 

장예슬은 먹질을 이어가고 있다. 작가에게 먹질은 먹에 대한 염려 그리고 먹과 함께 하는 행보를 포함하고 있다. 먹에 대한 염려는 곧 그것의 질을 찾아가는 과정일 것이다. 먹은 작게 흑과 백만을 드러낼 뿐이지만 인간의 사단과 칠정을 품고 있으며 나아가 무한을 담아낼 수 있는 것으로 여겨졌다. 장예슬은 먹으로서 가능한 모든 것은 아니더라도 작가 자신이라는 인간과 자신의 현재를 담아내는 것으로서 먹을 염려하며 함께하고 있다. 흑과 백이라는 대립항의 운영은 질을 결정하는 중요한 요소이다. 그 둘은 서로의 경계를 터뜨리고 막아가며 엮인다. 작가의 화면에서 어떤 흑은 강렬하지만 그 곁을 얇고 희미한 흐름이 돌아나가고 있으며 희미한 것들 사이에서도 찾을 수 있는 일렁임은 또 다른 곳으로 뻗어나갈 수 있는 추상의 동세가 된다. 그러한 동세를 다스리고 흐름을 만들어 나가는 것은 작가 자신이 살아가는 방법과 다르지 않다. 삶의 곳곳에서 짙고 옅음을 감지하고 화면 안에서 번지고 스미는 것. 그러한 순환의 순간순간 작은 자유를 생성해 내는 것이 장예슬의 작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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