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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ouble“돼지에 립스틱?”…예술계는 지금 ‘대작공화국'

2017.10.23

[머니투데이] 김고금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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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대한민국 공예품대전'에서 대통령상을 수상한 작품 '향의 여운'. /사진=뉴스1

미술·대중음악·출판 등 예술계 대작 관행, 공신력있는 대회까지 번져…법적·사회적 책임 약해 악순환

최근 국내 최고 권위의 공예품 대전에서 스승이 제자를 위해 출품한 사실이 알려지면서 ‘대작’(代作) 관행이 공신력 있는 기관의 행사까지 침투, ‘대작공화국’이라는 오명이 거세지고 있다.

지난 2015년 대한민국공예품대전에 옻칠장 A씨가 문하생 B씨를 위해 대작한 작품은 이 시상식에서 대통령상까지 받았다. 두 사람은 법원에 넘겨져 벌금 500만 원을 각각 선고(전주지법 남원지원)받았다.

예술계에 암암리에 퍼진 대작 관행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관행이라는 명분으로 대작은 창조의 또 다른 이름으로 둔갑했고, 설사 대작 행위가 들통 나도 용서받는 사회적 분위기를 틈타 아무런 죄의식 없이 계속돼 온 것도 현실이다.

무엇보다 자신의 창작물이 아닌데도, 1% 기여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떳떳한 창작자’ 행세를 하는 데서 대작 관행은 시작되고 완성된다는 게 전문가들의 설명이다.

대중적으로 가장 유명한 조영남 ‘대작 그림’ 사건도 1심 법원의 유죄 판결이 있었음에도 당사자 조씨는 판결에 불복해 항소했다. 이 사건을 맡은 서울중앙지법은 “대부분의 작업을 다른 작가가 완성하고 조씨는 마무리에만 일부 관여한 작품을 온전히 자신의 창작물이라고 표현하는 건 미술계에서 일반적으로 통용되는 관행은 아닐 것”이라며 “사회적으로 물의를 일으켰는데도 공인으로서 책임 있는 자세나 진지한 반성도 없는 등 범행을 가볍게 넘길 수 없다”고 유죄 선고 이유를 들었다.

가수 겸 화가 조영남씨. /사진=이기범 기자

조씨는 2011년 9월부터 2015년 1월까지 대작 화가 송모씨에게 주문한 그림에 덧칠한 뒤 이 중 21점을 팔아 1억 5350여만 원을 가로챈 혐의로 불구속기소됐다.

대중음악계에서 ‘대작’은 공공연한 비밀이다. 아이돌 그룹이 대중음악계 주류로 부상하면서 창작 수요가 많아지자, 작곡·편곡계에선 조수 작곡가를 두는 협업 시스템으로 바뀌었다.

이름난 작곡가가 처음에는 혼자 많은 곡을 만들었지만, 손이 바빠지면서 또는 창작 아이템이 떨어지면서 실력 있는 조수 작곡가의 곡을 가로채는 식이다. 조수 작곡가로 일한 적이 있는 A씨는 “유명 작곡가 밑에서 배운다는 도제식 교육 문화가 생기다 보니, 내 곡을 이름 없이 줘도 입봉작처럼 생각하게 됐다”며 “그런 관행에 이의를 제기하는 것 자체가 금기”라고 전했다.

대작 형태가 가장 횡행한 곳은 출판계다. 지난해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회고록 '협상의 기술'에 공동 저자로 이름을 올린 토니 슈워츠는 출간 30년 만에 대선 후보가 된 트럼프를 향해 “돼지에게 립스틱을 발라줬다”며 일격을 가했다. 슈워츠는 “책의 모든 내용과 단어를 내가 썼다”며 “트럼프는 빨간 줄만 쳤다”며 대필한 것을 후회한다고 말했다. 트럼프는 이에 대해 “내가 썼다”고 반박했다.

방송인과 쇼핑 호스트, 정치인 등 유명인들이 잇따라 대필 작가를 이용해 자신의 작품인 것처럼 호도하는 경우도 비일비재하다. 대기업 총수들의 베스트셀러 역시 대필 의혹에 휩싸였다.

대필작가는 자신의 이름을 드러내서는 안 된다는 출판 계약 조건을 악용한 사례인 셈이다. 생계가 달린 대필작가는 자신의 뛰어난 문장력에도 불구하고 유령작가로 살아야 했고, ‘창작자’로서의 온전한 몫도 보전받지 못했다.

자서전 위주의 대필 관행은 자기계발서, 수필, 동화에까지 번지며 글의 인격이 전반적으로 포장되는 악순환이 반복됐다. 출판사들은 이익 극대화를 위해 글보다 스타 마케팅을 통한 인지도가 필요했고, 이에 떠밀린 저자들은 대필을 관행처럼 쉽게 받아들인 것이다.

언론인 출신 작가 토니 슈워츠가 대필했던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의 회고록 '협상의 기술' /사진=마더 존스 닷컴

하지만 대필·대작 사실이 드러나도 법적 처벌로 이어지는 경우는 극히 드물다. 대필이나 대작은 사기혐의뿐만 아니라 저작권법 위반 혐의까지 적용할 수 있지만, 조영남씨 같은 저자의 ‘1%의 기여’가 저작권 판단에선 논란을 부추길 수 있고, 대작 작가가 소송을 고려하지 않으면 성립되기 어려운 측면이 있기 때문이다.

사기 혐의 역시 명의상 저작자와 실제 저작자가 다른 경우 이를 사기죄로 다룬 판례가 국내에 별로 없어 난항이 예상되는 부분이다.

법적 처벌이 어려운 상황에서 남겨진 처벌은 윤리적 또는 사회적 비난이지만, 이마저도 쉽게 용인되는 분위기라는 게 관계자들의 전언이다.

하재근 문화평론가는 “대필·대작은 힘없는 창작자의 인권을 유리하는 것일 뿐 아니라 창작자의 권리를 보호하는 기본 원칙에도 어긋나 결국 문화산업 발전을 저해하는 요소”라며 “법적, 사회적으로 문제시하지 않는 풍토가 대작 분위기를 관행으로 모는 주범이기 때문에 강력한 법적·사회적 책임을 묻는 풍토가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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