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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ouble[초점]‘민씨부인’ 초상, 과연 명성황후인가···4대 의문

2017.08.14

[뉴시스] 신동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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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뉴시스】 전(傳) 명성황후 초상. 견본, 수묵·담채 족자, 66.5×48.5㎝

명성황후(1851~1895) 초상이라는 그림이 나왔다. 서울 종로구 삼일대로 다보성고미술·다보성갤러리에서 김종춘 관장(한국고미술협회장)이 14일 공개했다.

김 관장은 “명성황후 초상이 확실하다”면서도 진위를 둘러싼 시비와 검증은 환영한다는 뜻을 밝혔다. 이 그림의 제목을 ‘전(傳) 명성황후초상’이라고 붙인 까닭이다. ‘전’은 전해진다, 즉 추정된다는 의미다.

그림 속 ‘명성황후’는 전신(全身)의 평상복 차림이다. 수건을 두른 두건을 쓰고 두툼한 서양식 의자에 두 손을 앞으로 모은 채 반듯이 앉았다. 얼굴은 왼쪽으로 살짝 돌렸다. 음영 처리한 수묵기법이나 왼손 장지에 한 짝의 연초록빛 옥가락지를 끼었고 당초문의 소파천은 갈색이다.

김 관장은 “지금까지 명성황후로 명확히 알려진 초상화나 사진 등이 없어 명성황후의 정확한 얼굴을 확인할 수 없는 실정”이라고 전제했다. 그럼에도 다섯가지 이유를 들어 그림 속 여성을 명성황후로 확신했다.

먼저, 명성황후 시해범인 미우라 고로의 글씨와 함께 이 그림이 일본식 표구 족자로 보관돼 있었다는 점에 주목했다. 또 평상복 차림의 이 여성 그림 뒷면에 ‘(민씨)부인’이라고 쓰여 있는데, 이는 당시 러시아 공사 웨베르의 ‘왕이 민 왕비를 평민으로 강등시키는 칙서를 내렸다’는 기록을 뒷받침한다는 것이다. 평복임에도 저고리에 모란, 치마에는 부평초꼴의 삼엽문 등이 있다는 사실도 특기했다. 평민의 옷에 넣을 수 없는 것들이며 의자를 덮은 고급 당초문 천 또한 이 여성의 신분을 방증한다고 봤다. 고급 가죽신(唐鞋)의 신코를 드러내고 그렸다는 점, 이승만 대통령 저 ‘독립정신’(1910)에 실린 명성황후 추정 사진과 한미사진미술관 소장 명성황후 추정 사진 못잖은 분위기와 품위가 엿보인다는 점도 강조했다.

【서울=뉴시스】 ‘민씨’ 적외선 촬영

이 초상은 운현궁에서 30여년 간 일한 박모(89)씨의 소장품이었다. 그저 ‘부인초상’이라고만 적혀있던 그림 뒤편 상단을 적외선 촬영, 지워진 두 글자 ‘민씨’의 윤곽을 찾아냈다. 김 관장은 “일제 치하에서 (그림의 주인공이 명성황후라는 것을) 숨기기 위해 누군가가 일부러 ‘민씨’를 삭제했던 것”이라고 짚었다.

그러나 ‘민씨부인초상’이라는 일종의 화제 중 ‘부인’을 ‘婦人’이라고 표기한 것은 이론의 여지가 있다. 명성황후보다 급이 낮은 여성도 대개 ‘夫人’이라고 불렸기 때문이다. 익숙한 호칭인 ‘정경부인’의 한자도 婦人이 아닌 夫人이다. 물론 소장자가 임의로 ‘민씨婦人초상’이라고 기재, 분류해뒀을 가능성도 있다.

명성황후 목격기와 초상 속 여성의 외모도 다소 어긋난다. 고종과 명성황후를 4차례 알현한 영국 지리학자 이사벨라 비숍은 ‘왕후는 40세가 넘었는데 우아한 자태에 늘씬한 여성이었다. 눈빛은 차갑고 예리했으며 반짝이는 지성미를 풍기고 있었다’고 전했다. 프랑스 ‘피가로 일루스트레’ 1893년 10월호에서 기자 거빌은 ‘그녀는 왕과 거의 같은 나이이며 자그마하며 아주 예뻤다’고 보도했다. ‘늘씬한’과 ‘아주 예뻤다’는 표현이 주관이기는 하다.

복식도 낯설다. 특히 모자 탓에 종교적 분위기를 풍긴다. 명성황후(민비·민자영)가 아닌 당대 다른 여성일 개연성을 무시할 수 없다. 흥선대원군의 부인도 민씨다. 그녀는 천주교 신자다. 그 무렵 민족종교인 태극도 도주(道主) 조정산의 어머니 역시 민씨다.

【서울=뉴시스】 ‘민씨’를 훼손한 부분

결정적으로 명성황후의 죽음과 초상화 중 여성의 패션은 시기가 맞지 않는다. 명성황후는 1895년 10월8일 살해당했다. 폐서인, 즉 서민으로 강등된 때는 시해된 후다. 생전에 왕비가 이런 복색으로 초상을 그리도록 했을 리는 없다는 짐작은 상식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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