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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eople佛 대표 여성화가 '마리 로랑생'을 재발견하다

2017.12.11

[머니투데이] 구유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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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리 로랑생 '키스'(Le baiser·1927) 81.2x65.1cm 캔버스에 유채. /사진=예술의전당

'마리 로랑생 展-색채의 황홀'…9일부터 내년 3월 11일까지

"내가 다른 화가들과 동떨어져 있다는 느낌을 받는 것은 아마도 그들이 모두 남자들이어서 일지 모른다. 남자들이란 내게 풀기 어려운 문제와 같다."(마리 로랑생)

20세기 유럽 미술계에서 파블로 피카소, 앙리 마티스 같은 거장들과 함께 이름이 오르내렸던 화가가 있다. 당시 거의 유일한 여성화가였던 것으로 알려진 마리 로랑생(Marie Laurencin·1883~1956)이다. 8일 서울 서초구 예술의전당에서 '마리 로랑생 전(展)-색채의 황홀' 개막을 앞두고 기자간담회가 열렸다.

히로하사 요시자와 마리로랑생 뮤지엄 관장은 "여성이 화가가 되는 게 어려운 시대였지만 로랑생은 여성의 감성으로 전혀 새로운 작품을 만들어냄으로써 세계적으로 유명세를 얻었다"며 "살아생전 마티스와 비슷하게 평가받았으나 사후 연구가 충분히 이뤄지지 않았다"고 했다.

프랑스 화가인 로랑생은 모국보다 일본에서 더 유명하다. 1970년대 프랑스 한 화랑에서 우연히 작가의 작품을 보게 된 요시자와 관장의 부친이 600여 점을 수집했다. 1983년에는 일본 나가노현에 개관한 '마리 로랑생 뮤지엄'은 연내 프랑스 정부 공식 인증을 받아 도쿄에 재개관된다. 현재 로랑생 작품 중 최고가는 '성 안에서의 생활'(1925)로 2억 5000만 원에 달한다.

마리 로랑생 '성 안에서의 생활'(1925) 작품 설명을 하는 히로하사 요시자와 마리로랑생 뮤지엄 관장. /사진=구유나 기자

로랑생은 파란만장한 인생사로도 유명하다. 그는 19세기 말 파리에서 국회의원인 아버지의 사생아로 태어나 아버지의 후원으로 경제적으로는 어렵지 않게 살았지만 어머니와 숨어 살며 정신적인 갈등을 겪었다. 로랑생은 조르주 브라크의 권유로 본격적인 미술 교육을 받았고, 급진 예술가들의 모임인 '세탁선'(Bateau-Lavoir)에 드나들며 파블로 피카소, 앙리 루소 등과 동료로 지냈다.

이번 전시를 기획한 스티브 김(한국명 김대성) 가우디움 어소시에이츠 대표는 "로랑생은 당시 동료들 사이에서 '입체파의 소녀' 또는 '몽마르트의 뮤즈' 등으로 불렸다"며 "하지만 그는 누구의 연인이기 이전에 70대까지 꾸준히 완성되어가는 한 명의 화가였다"고 말했다.

로랑생은 피카소의 소개로 만난 천재 시인 기욤 아폴리네르와 열애에 빠졌지만 결국 이별했다. 이때 아폴리네르가 겪은 실연의 아픔은 세계적인 명시 '미라보 다리'로 승화됐다. 이후 로랑생은 독일 귀족과 결혼하지만 1개월 만에 발발한 1차 세계대전과 남편의 알코올 중독과 방탕한 생활로 파국에 이른다.

로랑생의 그림은 1920~30년대 들어 전성기를 맞는다. 입체파(큐비즘)와 야수파(포비즘)의 영향을 받은 독자적인 화풍을 발전시켰다. 특히 장밋빛, 청색, 회색 등 우울한듯 몽환적인 색감은 '로랑생 컬러'라는 말을 만들어냈다. 또 여성의 눈으로 여성의 신체를 그림으로써 기존의 풍성하고 따뜻한 이미지에서 벗어나 고독과 슬픔, 자유의지 등을 담았다.

이외에도 로랑생은 코코 샤넬을 비롯한 명사들로부터 초상화 주문을 받고 의상, 무대 디자인, 잡지 표지, 상표 디자인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영역을 종횡무진했다.

이번 전시는 9일부터 내년 3월 11일까지 예술의전당 한가람미술관에서 개최된다. 로랑생의 유화 69점을 포함해 수채화, 일러스트, 사진, 도서 등 총 160점의 작품이 전시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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