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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eople[인터뷰]'1세대 조각가' 김윤신 "조각은 내 마음을 찾아가는 여정"

2015.06.15

[뉴시스] 신진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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탄생 80주년 한원미술관에서 회고전을 여는 김윤신 작가(사진=한원미술관) 2015-06-13

조각에 쓸 나무찾아 무작정 아르헨티나로
교수직도 포기…현지 '김윤신 미술관'도 개관
한국서 첫 회고전 '영혼의 노래 화업 60년'

“난 부자다. 자유롭게 작품을 할 수 있기에 돈 가진 자들보다 더 부자다.”

"‘마음이 어디 있으며 무슨 색깔이냐? 내가 누군인데 어디로 가고 있느냐?’ 내게 예술이란 작품을 통해서 오로지 그 길을 멈추지 않고 내 마음을 찾아가는 여정이다."

올해 팔순을 기념해 다음달 8일까지 서초구 남부순환로에 있는 (재)한원미술관에서 개인전 ‘영혼의 노래·김윤신 화업 60년’을 열고 있는 우리나라 1세대 조각가 김윤신 작가(80).

제2의 고향, 아르헨티나에서 무려 26시간의 비행 끝에 최근 모국을 찾은 김 작가는 팔순이라는 나이가 무색하게 젊고 당당했다. 조각에 쓸 나무를 자를 때 전기톱을 사용하다보니 귀가 잘 들리지 않는다고 했지만 대화를 나누는데 큰 불편은 없었다.

작가의 삶은 거침없고 뜨겁고 자유로웠다. 29세에 결혼 대신 파리유학을 선택했고 50세에 대학교수라는 안정된 직업을 버리고 낯선 땅 아르헨티나에서 조각가로서 새 삶을 개척했다.

1994, 分二分一No507, 86x35x72, Algarrobo (사진=김윤신미술관) 2015-06-13

현지에서 한국을 대표하는 예술가로 확고한 명성을 쌓은 그는 정착한 지 25년 만에 한국작가로서 최초로 생전에 자신의 작품을 한 자리에 모은 ‘김윤신 미술관’을 개관했다. 부에노스아이레스의 한인밀집지역인 플로레스에 있는 이 미술관에서 2년마다 전시회를 열고 있다.

서울에서는 지난 2007년 이후 8년 만이다. 이번 개인전은 한국 최초의 회고전이기도 하다. 나무의 숨결을 살리면서 인간의 ‘염원’을 담아내는 그의 작품세계를 접할 기회로 대표적인 회화와 조각, 설치 작품 70여 점을 선보인다.

◇ 아르헨티나에서 찾아낸 영혼의 울림

왜 아르헨티나로 갔을까? 그것도 교수라는 직업을 헌신짝처럼 버린 채. 김윤신 작가는 “오로지 나무 때문”이라고 답했다.

지금으로부터 32년 전인 1983년 12월. 당시 상명대 조소학과 교수로 있으면서 중견 작가로 이름을 떨치던 김윤신은 조카가 이민 가 있던 아르헨티나로 여행을 떠났다. 그곳에서 광활한 땅과 푸른 초원, 방목된 소들의 무리, 가도 가도 끝없는 산. 특히 ‘나무’를 보고 가슴이 뛰었다.

홍대 조소학과(1955~1959)를 졸업하고 전후(戰後)의 서울에서 고철 등을 구해다 작업하던 그는 파리 유학 시절(1964~1969)에는 돈이 없어 생활 주변에 널려있던 달걀판이나 파지, 유리로 부조작품을 만들었다.

1970년대부터 대학에서 강의를 하는 한편 작가로서는 다양한 실험 끝에 적송과 같은 나무를 오브제로 삼고 작업하던 중이었다. 하지만 당시 국토의 태반은 헐벗은 산이어서 나무 구하기가 쉽지 않았다.

아르헨티나 부통령 훌리오 끌레또 꼬보스와 함께(사진=김윤신미술관) 2015-06-13

늘 조각재료에 목말라했던 그에게 아르헨티나는 창작욕을 충족시켜 줄 천혜의 자연환경을 갖춘 곳이었다. 무작정 주한아르헨티나 대사관에 연락해 현지에서 전시회를 열고 싶다고 했다. 당시 대사관 직원이었던 고부안 씨는 부에노스아이레스의 시립현대미술관 관장인 로베르또 델 비쟈노 씨를 연결해줬다.

김윤신은 “작품을 봐야 전시회를 열수 있다고 해서 현지에서 바로 작업했다”며“ 따로 작업실이 없어 그냥 길에다 나무를 쌓아놓고 작품을 만들었다”고 회상했다.

그렇게 시작된 전시회는 반응이 뜨거웠고 전국 각지로 초청이 이어졌다. 김윤신은 그저 신이 났고, 그렇게 아르헨티나에 눌러 앉아버렸다.

“한국의 대학에서 언제 오냐고 독촉전화가 왔다. 사표를 냈는데 3년간 수리가 안됐다. 후회? 전혀 안 한다. 교편을 잡다보면 작업할 기회가 적다. 전 작가로서 성장하고 싶은 욕구가 컸다. 가난해도 예술가가 되고 싶었다.”

열망이 워낙 컸던 탓에 두려울 게 없었다. 자신을 “길을 가다 멈춘 사람”이라고 표현한 김윤신은 “수중에 100달러 밖에 없는데도 전혀 겁나지 않았다” 고 회상했다.

“냄비도 숟가락도 없었다. 하지만 자신만만했다. 살아남을 수 있다는 용기가 컸다.”

김윤신은 아르헨티나로 떠난 지 4년 만에 선화랑 초청으로 국내에서 전시회를 열었다. 그는 “죽지 않고 살아있다는 것을 모국에 보여주고 싶기도 했다”고 덧붙였다.

2013-50, 내영혼의 노래, 150x460, 유화(사진=김윤신미술관) 2015-06-13

◇ 조각은 마치 기도하는 과정 "인간 염원을 예술로 승화"

김윤신 미술관의 김란 관장은 “김윤신 선생이 지금도 매일 아침이면 미술관에 마련된 아틀리에로 출근해 종일 나무와 씨름한다”고 밝혔다.

‘영원한 현역작가’인 김윤신의 작업욕심은 홍대 미대시절에도 유별났다. 4년간 결석한 적 없는 그는 방학 때면 물 만난 고기처럼 점토로 10m 군상 조각을 혼자서 뚝딱 만들었다.

김란 관장은 “아르헨티나 정착 초기에는 나무를 트럭 2대 분량 씩 가득 싣고 와 작업실에 쏟아놓고 1년에 120점씩 만들었다”며 “전기톱으로 자르고 칼로 다듬고 사포를 문지르는 전 과정을 혼자서 다했다”고 했다.

나무로 주로 작업하나 그림도 꾸준히 그린다. 김란 관장은 “지난 2006년에는 1년에 300여 점을 그릴 정도로 회화에 몰두했다”고 말했다.

김윤신이 나무를 좋아하는 이유는 나무의 생명력 때문이다. "나무는 자르다보면 그 안에 무엇인가 뼈가 있고 혈관이 있고 생명이 있다는 걸 느낄 수 있다. 싱싱하게 살아있는 나무의 생명력을 끄집어내는 작업에 매력을 느낀다"

김윤신의 나무 조각은 주로 쌓아 올리거나 못을 쓰지 않고 끼워 맞춰진 형태를 하고 있다. 이는 인간의 염원, 하늘에 닿고자 하는 기원을 담고 있다.

2014, 祈願,二 52x32x33 나무 종류 미상(사진=김윤신미술관) 2015-06-13

왜 염원에 주목했을까? 김윤신은 "옛 어머니들의 정한수, 마을 어귀의 돌탑"을 언급하면서 하나뿐인 오빠 김국주 씨(1926~)가 독립운동을 했다고 밝혔다. 그는 광복회 회장을 역임했다.

“딸 다섯에 아들 하나였다. 집을 나가서 돌아오지 않는 외아들을 위해 엄마는 항상 오빠 밥을 먼저 퍼놓고, 밤이면 산 밑에서 물을 떠와 두 손 모아 빌었다. 당시는 너무 어려서 뭔지 잘 몰랐다. 막연히 인간은 의지할 곳은 찾고, 가슴 속에 염원이 있다고 생각했다.”

작업 초기에는 민간신앙에서 작품의 뿌리를 찾았다. 파리유학시절 조각과 더불어 판화를 전공한 그는 민간신앙의 하나인 부적의 글귀를 풀어 작업하기도 했다.

이 시기 천주교를 믿게 된 그는 “사람의 염원을 예술로 승화시키려니 자연스레 영적인 것과 연결됐다”며 “결국 예술이란 영혼에 관한 것이 아닌가”라고 했다.

"매일 매순간 절대자와 대화를 나누듯이 기도 속에서 나의 조형언어는 시간과 유한성을 초월한, 작품자체에 뿐만 아니라 주위의 자연과 전체로 결합하는 총제적 합(合)과 분(分)인 합이합일, 분이불인이란 연작으로 이어졌다."

"산다는 것 자체가 순간순간마다 변화해 가는 것이기에, 그 어느 순간도 다시 돌아오지 않는 그야말로 우리가 겪는 하루하루의 삶이 절대적인 삶이기에, 반복되는 혹은 유사한 형태의 작품이 나오지 않는 당연한 이치와 같다.”

“나의 회화 작품은 영원한 삶의 나눔을(합과 분) 주제로 한다. 나눔의 본질은 사랑이며, 그 깊은 내면에는 원초적 생명력이 뿌리 깊게 박혀있다. 그것을 향한 내 깊은 곳에서 울려나오는 영혼의 노래, 그 영혼의 소리는 다양한 색상의 파장으로 선과 면을 이루어 사랑과 나눔을 표현한다.”

한편 김윤신과 오랜 인연을 이어온 고석림 무용평론가는 작가에 대해 “순수 고집 영성 덩어리‘의 작가라고 정의했다. 예술에 대한 순수한 고집이 그를 자유로운 영혼의 삶에 이르게 한 것이리라. 전시는 다음달 8일까지 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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