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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eople"화폭에 담기는 건 황혼의 아름다운 내 삶"

2008.04.01

[머니투데이] 이정흔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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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도 예상치 못한 변신이었다. 30년 동안을 언론계와 학계에서 사회과학을 공부하며 살아온 강현두(71) 전 서울대학교 언론학 교수. 그가 인생의 마지막을 '화가'라는 직업으로 마무리하게 되리라고는 사실 그 자신조차도 생각지 못한 일이었다.

늦더위가 기승을 부리던 2007년 8월 말 서울 프레스센터의 서울갤러리에는 '강현두 수채화 작품전'이라는 간판이 내걸렸다. 강 교수가 직접 세계를 돌아다니며 눈으로 마음으로 담았던 풍경을 캔버스에 옮겨 놓은 말하자면 그의 첫 번째 전시회였다.

↑ 한화증권 진수형 대표.

◆'연필과 종이만 들고' 겁없이 뛰어든 미술

"30년 동안 학자로만 살아왔던 노교수가 어느날 갑자기 붓을 들었다 하니 사람들 호기심이 발동했나 봅니다. 지인들 몇몇만 초대하며 조촐하게 제가 '그림쟁이'가 됐음을 알리는 자리였는데 생각보다 많은 사람들이 와서 축하해 주었습니다. 쑥스럽죠. 그간 소일거리 삼아 그렸던 그림인데 사람들 앞에 내놓으려니 멋쩍기도 하고. 하지만 액자 프레임 하나 고르는 것까지 내 손으로 직접 챙겨온 작품들이라 그런지 뿌듯함이 더 크더라고요."

그가 '그림'이라는 낯선 세계에 발을 들여놓은 건 지금으로부터 8년 전인 2000년 무렵. 서울대 언론학 교수로 재직 중이던 그가 명예퇴직을 하게 되면서부터다. 명퇴 이후에 무엇을 할까 고민하던 차에 문득 '그림을 그리면서 늙어가면 참 멋있겠다'라는 생각을 했던 것이 우연한 인연의 시작이었다.

"사실 우리 때만하더라도 '은퇴 후'의 삶이라는 건 생각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막상 은퇴라는 게 나한테 현실로 다가오니 걱정이 되더라고요. 나이 들어서 '뭘 하고 살아야 할까'라는 고민을 하게 될 줄 누가 알았겠습니까. 하하. 퇴직 2~3년 전부터 조금씩 진지하게 고민하기 시작했죠."

강 교수는 은퇴 후 할 일에 대해 먼저 조건을 몇 가지 정했다. 우선 은퇴라는 건 결국 '일하기엔 너무 나이가 많다'는 것이다. 그러니 나이에 구애받지 않고 오래도록 할 수 있는 일이어야 했다. 다음으로는 '제2의 인생'은 지금껏 살아온 인생과 전혀 다른 삶을 살아보고 싶었다. 오랜 세월동안 사회현상을 논리적으로 분석하는 일을 주업으로 삼으며 살아왔으니 이제는 예술의 영역으로 넘어가 창조적인 일에 도전해 보고 싶었다.

마지막으로 나이들어 시작하는 일인만큼 새로운 기술을 자꾸 배워야 하는 분야는 가급적 피하고자 했다. 기초만 탄탄히 배워놓으면 언제 어디서든 풀어먹을 수 있는 전통적인 재주. 그러다보니 그의 머릿속에 떠오른 건 "종이와 연필만 있으면 오래도록 즐길 수 있는 전통 예술인 회화였다"고 말한다.

"지금 돌이켜보면 제가 잘 몰랐으니 겁없이 미술분야에 뛰어들 수 있지 않나 싶습니다. 저는 정말 '종이랑 연필만 있으면 할 수 있는 게 그림'이라고 생각을 했었거든요. 언론학이라는 게 대중문화와는 뗄레야 뗄 수 없는 만큼 이론적으로는 생소하지 않은 분야라는 것도 작용을 많이 했었던 것 같습니다."

분야가 정해지고 나자 그 다음에는 어디서 어떻게 배울 지를 결정하는 것이 문제였다. 교육에 몸담고 있었던 그였기에 아무리 취미삼아 하는 소일거리라도 허술하게 배우는 것은 탐탁치 않았다. 믿을 만한 교육기관을 수소문하다가 알게 된 곳이 반포 예술의 전당 아트센터에서 운영하는 '미술아카데미'였다.

"그때가 2000년 3월일 겁니다. 기초반에 등록을 하고 첫 수업에 나갔는데 머리 하얀 노인네가 교실에 앉아있으니 학생들 대다수가 절 선생으로 알고 꾸벅 인사를 하는 겁니다. 그래도 무언가를 배우기 위해 열심으로 노력했던 그때가 참 좋았던 것 같습니다."

모처럼 용기를 내 시작한 그림 수업이었지만 꾸준히 그림을 배우는 일이 그의 계획처럼 순탄하지는 않았다. 2000년 가을 위성방송이 첫 개국을 맞으면서 강 교수가 스카이라이프 초대 사장으로 선임된 것이다. 국내에 처음 시작하는 큰 사업을 맡았으니 강 교수의 스케줄 역시 눈코뜰새없이 바빠지는 건 당연지사였다. 그러나 강 교수는 바쁜 스케줄 속에서도 일주일에 한번, 월요일 저녁 3시간 만큼은 미술아카데미 수업을 위해 항상 시간을 비워둘 정도로 열정을 놓지 않았다.

"그때 만약 그림을 포기했더라면 아마 다시 시작하는 것이 쉽지는 않았을 겁니다. 바쁜 생활 속에서도 일주일에 한번씩이나마 꾸준히 붓을 잡고 그림을 배웠던 것이 도움이 많이 됐죠. 회사일이 아무리 바빠도 아카데미에서 수업을 들을 때면 모든 일을 잊고 그림에 전념할 수 있으니 스트레스 해소에도 도움이 됐고요. 수채화라는 것도 이곳에서 처음 접하고 배웠습니다. 우연히 시작한 그림인데 열심히 하다보니 그걸로 전시회도 열고 제2의 직업으로도 삼게 됐네요."

◆즐길 줄 아는 태도가 더 중요

"원래 그림에 소질이 있으셨나봐요?", "언제부터 그림을 좋아하셨어요?" 강 교수가 전시회를 열고 나서 가장 많이 받는 질문이다. 그때마다 강 교수의 대답은 한결 같다.

"나이 60이 넘어 처음 붓을 들기 시작했는데 제가 원래부터 그림에 소질이 있었는지는 알 방법이 없죠. 하지만 분명한 건 제가 그림에 재주가 뛰어나서 지금과 같은 노년기를 보내고 있는 건 아니라는 겁니다. 무슨 일이됐든 재주란 먼저 시작해 놓고나서 열심히 따라가다보면 나중에 채워지기 마련입니다. 그러니 재주가 없어서 못한다는 말은 핑계에 불과한 거죠. 저만해도 처음에는 그림을 배운다는 말을 지인들에게 하지 않았습니다. 제가 그림에 재주가 있을 거라 생각했다면 왜 그랬겠습니까. 이게 나한테 맞는 일인지 아닌지 저도 잘 몰랐으니까 결과물이 나올때까진 자연스럽게 묻어둘 수 밖에 없었던거죠."

그는 4B연필에 얽힌 일화 하나를 소개한다. 미술아카데미에서 기초반 수업을 듣기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의 일이다. 선생님이 '스케치 북'과 '4B' 연필을 준비해 오라는 숙제를 냈다고 한다. 강 교수는 일단 무작정 문방구를 찾았다. 스케치 북이야 '그림 그리는 종이' 인 줄은 알았으니 별 어려움이 없었다. 그런데 '4B'연필은 미술 정규교육을 한 번도 받아 본 적이 없던 그에게는 생소하기만 했다.

그림 그릴 때 쓰는 연필은 또 특별한 게 있나보지? 어떻게 생겼을까? 문방구에 없으면 어떡하지? 온갖 고민을 다하며 주인장을 향해 자신없는 목소리로 '4B연필' 하나를 주문했다. 그러자 주인이 평범한 연필 한 자루를 꺼내 강 교수 앞에 놓았다. "이게 4B연필이라는 거요?" 강 교수가 자신없이 묻자 주인이 대수롭지 않다는 듯 대답했다. "네, 보세요. 거기 4B라고 써 있잖아요."

"한국전쟁시대에 학교를 다녔던 우리 세대만 해도 학교에서 미술이나 체육 같은 예체능 과목을 정규과정으로 배워 본 적이 없습니다. 그만큼 미술에 대한 기초 지식도 없이 시작했던 셈이죠. 그래서 지금도 이메일 주소는 '4B'로 시작합니다. 지금이야 웃으며 말하지만 그때는 내가 과연 미술을 계속할 수 있을지 나 스스로도 함부로 확신하지 못했던 때니까요. 그렇게 시작했는데도 지금은 그림쟁이로 노년기를 보내고 있지 않습니까. 더군다나 노년기는 누구의 눈치도 보지 않고 먹고 살 걱정없이 마음껏 자유롭게 살아갈 수 있는 시기가 아닙니까. 뛰어난 재주보다는 진정으로 자신의 일을 즐길 줄 아는 태도가 더 중요한 거죠."

◆"포기하지 않으면 풍요로운 노년 기다려"

그는 은퇴한 사람들 역시 보다 적극적으로 은퇴 후의 삶을 꾸려나갈 '권리'가 있다고 주장한다. 정년이라는 게 결국은 사회를 위해 그 사람이 해야 할 몫을 훌륭하게 해냈다는 뜻이고 그러니 이제부터 진짜 자유롭게 자신의 인생을 즐길 권리가 은퇴자들에게는 부여된다는 것이다.

"지금까지 인류가 살아오면서 은퇴 후의 삶을 걱정하는 세대는 아마 우리 세대가 처음일 겁니다. 예전에는 정년할 때까지만 살아도 오래 살았다고 축하를 받을 일이었으니 은퇴 뒤에 있을 10~20년의 긴 세월을 걱정할 필요가 없었던 거죠. 그러니 나는 지금 아무도 발자국을 내지 않은 하얀 눈밭에 처음으로 발자국을 만들며 걸어가고 있는 중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 세대가 하얀 눈 위에 바른 길을 내줘야 후배들이 그 길을 따라올 수 있겠죠. 무엇보다 누가 어떤 길을 선택하든 열심히 꾸준히 포기하지 않고 걸어간다면 그 길 끝에 풍요로운 노년의 삶이 기다리고 있다는 것 만큼은 확실하게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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