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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eople[인터뷰] 박수근 아들 박성남 화가 "재테크 수단된 아버지 그림, 공공미술관에 더 걸리길"

2015.07.24

[뉴시스] 신진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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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만큼은 아니더라도 작업을 하고 있으니 기대해달라.”

‘국민화가’ 박수근 화백의 아들인 박성남(68)씨가 거목의 아들이 아닌 한 사람의 현업작가로서 근황을 공개했다.

80년대 중반 호주로 이민가 호주시민권자지만 10여 년 전부터 한국에 체류 중인 박성남 씨는 지난 23일 개막한 2015평창비엔날레에 신작 2점을 출품했다. 특별전 ‘포스트 박수근’을 통해서다.

올해 2회째를 맞은 2015평창비엔날레는 ‘생명의 약동’(엘랑 비탈)을 주제로 주제전시와 ‘포스트 박수근’ ‘DMZ별곡’ ‘힘 있는 강원’으로 구성된 특별전 그리고 부대행사인 GIAX페어까지 3개 부문 8개 행사로 강원도 전역 17개소에서 215일간 펼쳐진다.

‘포스트 박수근’은 박수근 화백 서거 50주년을 기념해 마련한 특별전. ‘마티에르 및 물성’ ‘삶의 풍경들’ ‘소박 및 절제미’ ‘자연’ ‘토속적 소재와 감성’ 등 박수근 화백의 예술적 특징을 계승하는 작가 52명의 작품으로 편성한 전시다. 23일부터 10월29일까지 평창을 시작으로 춘천, 양구, 강릉, 속초에서 순회전으로 열린다.

박성남 작가는 이번 특별전에 ‘나팔불때-부활’ ‘층-나팔불때’ 등 2점의 작품을 출품했다.세로가 긴 나무판에 구멍을 움푹 팠는데, 마치 그 모양이 밥그릇 같다. 그릇 형태에는 ‘사랑의 전도사’이자 ‘화평의 전도사’인 나팔수가 작게 붙어있다. 혼합재료로 색과 빛과 층을 표현했다.

23일 평창 알펜시아에서 만난 박성남 작가는 “고전이 된 작가의 정신을 계승하고 차세대 박수근, 차세대 이중섭을 찾기 위해 마련된 이번 특별전에 박수근의 아들이 아니라 현역작가로서 갈채를 보내고 싶다”고 소감을 밝혔다. 또한 “아버지만큼은 아니라도 작업을 하고 있으니 기대해달라”고 당부하면서 자신 인생의 숙제는 “아버지의 예술미학을 전 세계에 알리는 것”이라며 자부심과 사명감도 드러냈다.

박성남 작가는 앞서 서울 호암아트홀에서 ‘한호수교50주년기념전’, 강원도 양구에 있는 박수근미술관에서 한 ‘박수근3대에 걸친 화업의 길’, 인도 국립라리트아카데미에서 한 ‘제5회 인도트리엔날레’, 일본 동경도미술관의 ‘동경도현대미술전’ 등에 참여했다. 큰아들인 진흥씨도 할아버지와 아버지의 뒤를 이어 3대가 그림을 그리고 있다. 다음은 박성남 작가와 나눈 일문일답.

- 우리시대 박수근의 의미는

“요즘 경계가 무너지고 퓨전, 통합, 융합이 강조되고 있다. 하지만 이러한 경계허물기가 과연 바람직한가? 오히려 제자리를 소박하게 지키는 것이 필요하지 않나? 아버지는 해방과 6.25전쟁, 4.19, 보릿고개, 홍수, 전염병 등 격동의 시대를 거치면서도 흔들림 없이 ‘인간의 선함과 진실함’을 그렸다. 또한 가장 한국적인 것을 추구했다. 독일의 철학자 괴테가 가장 민족적인 것이 가장 세계적인 것이라고 말했다. 아버지의 예술태도나 미학이야말로 민족성이 사라지고 경계가 사라진 이 시대에 우리들의 정체성을 찾는 좋은 전진기지가 될 수 있다고 본다.”

- ‘국민화가’ 아버지의 그늘을 벗어나기 쉽지 않을텐데

“그저 ?는다고 할까. 수모도 많이 당했다. 하지만 아버지의 그늘이라고 생각하고 싶지 않다. 아버지는 단순한 삶을 살았다. 비가 오면 비를 맞고, 바람이 불면 바람을 맞았다. 그런 상태를 선하다고 봤다. 봄이 여름에게 모든 것을 다 내주듯 그렇게 이타를 실현했다. 연필로 드로잉을 하다가 나중에는 그 몽땅 연필과 지우개도 그렸다. 공책에도 적어둔 단어였는데 ‘나이브 Naive'를 추구했다. 가미되지 않은 순수한 상태, 소박함을 지향했다. 아버지의 미학 정신을 따르면서 제 작업을 함과 동시에 '아버지의 미학’을 세계에 알리는 것이 제 숙제다.”

- 아들이 기억하는 박수근은 어떤 아버지였나?

“소처럼 성실하게 일하는 사람이었다. 아내와 가족, 이웃과 나라를 사랑했다. 지극히 평범했다. 걸레질도 하고 빨래도 널고 요강도 닦고 이불도 개고 마당도 쓸었다. 12살에 밀레 같은 화가를 꿈꾼 소년이었고, 사후 40년 만에 한국의 밀레가 됐다. 흰 고무신에 하얀 ‘난닝구’를 즐겨 입던 아버지가 미술계의 거목이 됐다. 제게 아버지는 하루하루 성실한 삶이 결국 리더로 이끈다는 교훈을 주는 존재다.”

- 아버지의 그림이 호당 억을 호가하나 유족들은 그 혜택을 누리지 못하는 현실이다.

“나도 아버지의 그림 값이 때로는 의문이다. 살아생전에는 평가받지 못한 그 그림들이 ‘억억’하다 보니 자꾸 금고 속에 들어가는 현실도 안타깝다. 우리에게 아버지의 그림은 마티에르 하나하나가 쌀이었고 학비였다. 그걸로 족하다. 유족들에게 그림의 가치는 가격을 매길 수 없다. 다만 쌀 몇 말에 팔리던 게 어느 순간 상류층의 재테크 수단이 되면서 서민들의 삶과 멀어지고 있다. 누구나 향유할 수 있게 공공미술관에 더 많이 걸리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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