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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eople백남준과 함께 기억해야 할 이름 '거장 이쾌대' 회고전

2015.07.24

[뉴시스] 신진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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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쾌대_두루마기 입은 자화상_1940년대 후반_캔버스에 유채_72x60cm_개인소장(사진=국립현대미술관) 2015-07-21

월북화가로 1988년까진 잊혀진 화가
22일~ 11월1일 덕수궁관서 대규모 전시

비디오 아티스트 백남준(1932~2006)과 화가 이쾌대(1913~1965)는 20세기 한국미술을 대표하는 작가로 손꼽힌다.

이쾌대가 그린 ‘두루마기 입은 자화상’(1940년대)은 한국의 대표적인 걸작이나 월북화가라는 이유로 1988년 해금조치 이전에는 이름이 거론되는 것조차 금기시됐다.

국립현대미술관이 광복 70주년을 기념해 이쾌대의 예술세계를 한눈에 볼 수 있는 대규모 회고전 ‘거장 이쾌대, 해방의 대서사’를 22일부터 11월1일까지 덕수궁관에서 개최한다.

이쾌대는 해방기 우리 민족이 처한 현실과 예술가의 사명을 붓으로 끌어안았던 화가다. 그가 남긴 그림들은 대략 1930년에서 1950년 무렵까지 20여 년간 제작됐는데, 이 시기는 일제강점기, 해방기 그리고 한국전쟁기로 한국역사의 비극적 시대와 겹친다.

이쾌대_카드놀이하는 부부_1930년대_캔버스에 유채_91.2x73cm_개인소장(사진=국립현대미술관) 2015-07-21

이쾌대는 바로 이 암울한 시대를 딛고 예술혼을 꽃피운 화가로 일제 식민지 시기 우리나라의 전통문화에 어울리는 한국적 서양화를 모색하고, 해방 후에는 새로운 민족미술이 나아갈 방향을 제시하려 했다.

그는 진지한 탐구정신과 뜨거운 열정으로 당시 화단을 이끌었고, 탁월한 그림실력과 독자적인 주제의식으로 한국 근대미술사에 뚜렷한 자취를 남겼다.

이번 전시는 휘문고보부터 제국미술학교 재학시절인 학습기(1929~1937), 귀국 후 신미술가협회를 중심으로 새로운 미술을 시도하는 모색기(1938~1944), 그리고 해방 이후 탁월한 역량을 기반으로 한국적인 리얼리즘 미술세계를 구현한 전성기(1945~1953)로 나누어 이쾌대의 작품세계를 보여준다.

유족이 비공개로 소장하고 있던 드로잉 300여 점 가운데 엄선된 150여 점과 이쾌대가 그린 잡지 표지화, 삽화 등도 함께 소개한다. 또 서양화가 김창열, 심죽자, 김숙진, 조각가 전뢰진 등 제자들의 인터뷰 영상 등을 통해 이쾌대의 따스한 인간애를 느낄 수 있도록 했다.

김예진 학예연구사는 21일 전시 개막을 앞두고 열린 기자회견에서 “1953년 월북 이후 남한에서는 이름 석 자 조차 언급이 금지됐다”며 “ 북한에서도 평탄치 않았다. 앞서 월북한 12살 많은 친형 이여성이 숙청된 후 활동이 뜸해졌고 1998년에서야 공식적으로 이름이 거론됐다”고 설명했다.

이쾌대_운명_1938_캔버스에 유채_156x128cm_개인소장_1939년 일본의 유명 전람회인 '니카텐(二科展)'에서 입선한 작품(사진=국립현대미술관) 2015-07-21

남한에서는 1988년 월북 작가 해금 조치 이후 1991년 신세계미술관의 ‘월북작가 이쾌대전’이후 대중에게 점차 그의 이름이 알려지기 시작했다. 이후 2013년 대구미술관·대구문화재단이 이쾌대 탄생 100주년 학술대회와 유족 소장 작품전을 열었다.

김예진 학예연구사는 “기존 전시와 달리 이번 전시에서는 이쾌대 대표작이 빠짐없이 다 전시될 뿐만 아니라 미공개 아카이브가 망라됐다는 점에서 차별된다”며 “이쾌대의 예술세계를 한눈에 볼 수 있는 최대규모 회고전”이라고 자부했다.

◇ 이쾌대는 누구?

1913년 경북 칠곡 부잣집 아들로 태어난 이쾌대는 서울의 휘문고보를 졸업한 뒤 일본으로 건너가 제국미술학교에서 서양화를 배웠다. 학창시절 이쾌대는 인물화에 관심을 보였으며, 일본의 유명 전람회인 ‘니카텐’(二科展)에서 ‘운명’(1938)으로 입선하면서 두각을 나타냈다.

귀국 후에는 이중섭(1916~1956), 최재덕(1916∼?) 등 일본 유학출신 화가들과 함께 신미술가협회를 결성하고 한국적인 감성의 세련된 서양화들을 선보였다.

이쾌대_부녀도_1941_캔버스에 유채_73x60.7cm_개인소장(사진=국립현대미술관) 2015-07-21

이번 전시에서 ‘1929년~1937년’에 그린 작품들을 보면 인물화가 대다수다. 이쾌대는 휘문고보 졸업반이던 때 아내 유갑봉과 결혼했고 유학시절을 아내와 함께 보냈다. 그는 아내를 모델로 그림을 수없이 그렸고, 아내의 초상화는 이후 조선의 전통적인 여성상으로 변화했다.

이쾌대 그림 속의 여성은 독립적이고 당당한 모습을 하고 있다. 또 인물을 사실적으로 그리기보다 그 인물이 지닌 분위기와 감정을 화폭에 담아냈다.

‘1938~1944년’은 신미술가협회 활동을 중심으로 한국적인 서양화 양식을 모색하던 시기로 과감한 색면 처리, 밝고 명랑한 색채의 사용, 검은 필선의 강조 등 예술적 실험을 시도했다.

1945년 해방 후에는 ‘군상―해방고지’(1948)와 같은 대작을 발표하며 화단에 큰 충격을 주었다. 이런 대작에서는 르네상스 미술부터 20세기 초 사회주의 리얼리즘까지 다양한 미술을 폭넓게 수용한 흔적을 엿볼 수 있다.

이쾌대는 예술가의 역할과 사명을 고민하면서 창작의욕을 불태우는 한편, 홍익대학교 강사, 국전(대한민국미술전람회)의 추천화가 등으로 왕성하게 활동했다.

이쾌대_군상4_1948 추정_캔버스에 유채_177x216cm_개인소장(사진=국립현대미술관) 2015-07-21

그러나 6.25 전쟁 발발 당시 병환 중인 노모와 만삭인 부인 때문에 피난을 가지 못했고 서울을 점령한 북한군의 강요로 조선미술동맹에 가입해 김일성, 스탈린이 초상화를 그리는 강제부역을 했다.

서울 수복 이후 부산의 포로수용소에 수감된 그는 가족의 품에 돌아가기만을 고대하나 1953년 남북한 포로교환 때 북한을 택했다.

이쾌대는 포로수용소에 있을 당시 아내에게 편지를 보내 그림을 팔아 생계를 유지하라고 당부했지만 아내인 유갑봉 여사는 어린 네 자녀의 생계를 어렵게 꾸리면서도 남편의 작품을 고스란히 지켜냈다.

유갑봉 여사는 다락방에 남편의 그림을 숨겨놨는데, 캔버스에서 그림을 떼 내 신문지에 둘둘 말아 보관했다. 막내아들 한우 씨는 고등학생이 될 때까지 아버지의 그림이 존재하는지도 몰랐다.

이쾌대의 그림이 세상에 드러난 것은 한우 씨가 1980년 돌아가신 어머니를 대신해 1988년 해금 이후 미술품 수복 전문가에게 작품의 복원을 맡기면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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