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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eople'흙인지 고목인지' 오묘한 천지문으로 들어간 화가 윤형근

2018.08.03

[뉴스1] 여태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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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형근, 청다색, 1976-1977, 면포에 유채, 162.3x130.6cm.(국립현대미술관 제공)

"거목이 넘어져서 썩어가는 것을 봤다. 한쪽은 이미 흙이 되어 가고 있었다. 분명히 그 빛깔은 흙 빛깔과 다름없었다. 나는 그 광경을 보고 숙연해졌다."(윤형근 일기 중에서, 1986년 9월19일)

한국 단색화의 거목으로 알려진 윤형근(1928~2007)은 십수년 전 오대산 깊은 산중에 쓰러져 있던 거목에서 받은 감동과 영감을 그의 일기에 이렇게 기록했다.


윤형근은 자신의 그림 명제를 스스로 '천지문'(天地門)이라고 붙이고는 "블루(Blue·청색)는 하늘이요. 엄버(Umber·암갈색)는 땅의 빛깔이다. 그래서 천지라 했고, (내 그림의) 구도는 문이다"라고 했다.

그는 이 두가지 색을 섞은 오묘한 검정으로 보는 이에 따라서는 고목이나 거대한 암벽을 연상시키는 솟아오른 두개의 기둥 혹은 작대기를 그렸다. 그러고는 두 기둥 사이 아무 것도 바르지 않은 생 면포(혹은 마포)를 그대로 드러냈다.

산수화 같기도 하고 서예 같기도 한 그의 그림에서는 옹기와도 같은 질박미가 느껴진다.

윤형근 국립현대미술관 전시전경© News1

윤형근은 1947년 서울대 미대에 입학했지만 26년이 흐른 1973년 그의 나이 만 45세가 되어서야 본격적으로 그림을 그릴 수 있었다.

국대안 반대시위에 참가했다가 제적 당하고 한국전쟁 발발 직후에는 보도연맹에 끌려가 학살 당할 위기를 간신히 모면하기도 했다. 1956년에는 전쟁 중 피란 가지 않고 서울에서 부역을 했다는 명목으로 6개월간 서대문형무소에서 복역하고 숙명여고 미술교사로 재직 중이던 1973년에는 당시 최고 권력자인 중앙정보부장의 지원으로 부정 입학한 학생의 비리를 따지다가 반공법 위반으로 잡혀가 고초를 겪는 등 힘겨운 젊은 시절을 보냈다.

기나긴 암흑기를 거친 윤형근은 그가 명명한 '천지문'의 작품세계로 시행착오 없이 곧바로 들어갈 수 있었다.

그의 오랜 벗인 조각가 최종태는 "'왜 시커먼 작대기만 그리시오?' 하고 내가 말을 건넸을 때 '화가 나서 그래!' 그게 그의 대답이었다"라고 회상했다.

윤형근의 작품세계에 가장 큰 영향을 준 것은 그의 장인이자 스승인 김환기(1916~1974)와 추사 김정희였다.

서울대 입학 시험장에서 감독관이던 김환기와 처음으로 만난 뒤 홍익대에서 스승과 제자로 재회하고 김환기의 장녀 김영숙과 결혼했다. 윤형근은 김환기가 세상을 떠났을 때 통곡할 정도로 너무나 그를 존경했지만 동시에 넘어서야 하는 벽이기도 했다.

윤형근이 1974년 10월 (김환기 작고 후) 서교동 화실에서 김환기의 작품과 자신의 작품의 앞에서 찍은 사진.(국립현대미술관 제공)

윤형근은 김환기가 사망한 해인 1974년 10월 서교동 화실에서 김환기의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와 자신의 '천지문' 신작들을 배경으로 한 사진을 남겼다.

국립현대미술관 김인혜 학예연구사는 "상당히 연출된 사진으로 윤형근이 김환기와 결별하고 이제 나의 길을 가겠다를 선언한 사진"이라고 해석했다.

윤형근은 김환기의 작품을 "잔소리가 많고 하늘에서 노는 그림"이라고 평가한 반면 자신의 작품은 "잔소리를 싹 뺀 외마디 소리를 그린 것"라고 정의했다. 김환기의 블루가 하늘과 가깝다면 윤형근의 오묘한 검정은 흙과 닮아 있다.

또한 그의 그림의 간결함과 질박미는 추사의 작품 세계와도 닿아 있다.

그는 평생 추사가 추구했던 '잘 되고 못되고를 굳이 따지지 않는다'는 불계공졸(不計工拙) 세계, 기교를 경계하고 졸(拙)의 경지를 추구한 것으로 전해진다.

윤형근의 삶과 작품 세계를 조명하는 회고전이 8월4일부터 12월16일까지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열린다.

전시를 기획한 김인혜 학예연구사는 "윤형근은 단색화라는 틀에 넣기에는 작품 세계가 너무 큰 작가였다"고 설명했다.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처음으로 열리는 이번 회고전에서는 유족들이 보관해온 작품 뿐만 아니라 윤형근의 일기와 노트, 김환기가 윤형근과 김영숙 부부에게 보낸 편지 등이 최초로 공개된다.

특히 1980년 광주민주화항쟁을 목도한 후 안타까운 마음과 울분을 담은 작품 2점도 처음으로 전시한다.

윤형근, 다색, 1980, 마포에 유채, 181.6x228.3cm, 광주민주화항쟁을 모티브로 한 그림.(국립현대미술관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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