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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eople'1000억원 규모' 작품 속 고뇌와 연구, 민족애 담겨

2018.05.23

[머니투데이] 배영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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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환기 아틀리에, 파리, 1957 ⓒ Whanki Foundation · Whanki Museum/사진제공=대구미술관

대구미술관, 추상미술 선구자 김환기 최대규모 기획전…초창기 구상부터 전면점화까지 108점 전시


"내가 그리는 선, 하늘 끝에 더 갔을까. 내가 찍은 점, 저 총총히 빛나는 별만큼이나 했을까. 눈을 감으면 환히 보이는 무지개보다 더 환해지는 우리 강산."(1970년 1월27일)

"미학도 철학도 문학도 아니다. 이 자연과 같이 점(點) 이외에 아무것도 아니다. 그림일 뿐이다."(1974년 6월28일)

한국 추상미술의 선구자 김환기 화백(1913-1974)이 미국 뉴욕에서 쓴 일기 중 일부가 전시장 벽면에 시처럼 내려앉았다. 뉴욕은 김환기 예술세계 정수를 보여주는 전면점화(全面點畵) 작품이 완성된 곳이다. 한국 근현대 미술 경매 낙찰가 '톱5' 안에 드는 작품 모두 김환기의 뉴욕시절 작품이다.

개막을 하루 앞둔 21일 찾은 대구미술관은 ‘김환기 기획전’ 개막 준비에 한창이었다. 대구 외곽에 위치한 미술관 주변은 푸른 산이 감싸고 있었다. 미세먼지도 없었고 고요했다. 평생 우리 강산과 민족을 향한 향수를 화폭에 담았던 김환기 화백의 작품 세계를 온전히 감상하기에 더없이 좋은 공간이었다.

전시장엔 초창기 구상 작품부터 전면 점화에 이르기까지 김환기 작품 세계의 변화 과정을 한눈에 볼 수 있는 다양한 작품이 빼곡히 들어섰다. 시대별 작품 108점과 작가의 진솔한 삶을 돌아볼 수 있는 아카이브 100여점, 다큐멘터리 영상 등이 한자리에 모인 것. 한국적 서정성을 세련되고 정제된 조형언어로 승화시켜 독자적인 예술세계를 정립한 면모가 확인된 순간이었다.

1917년 전라남도 신안군 기좌도에서 부농의 아들로 태어난 김환기는 미술 공부를 위해 1931년 일본 유학을 떠났다. 일본대학 미술학부에 다니며 서양화를 본격적으로 배우며 활발하게 활동했고, 이후 서울과 프랑스 파리, 다시 서울, 그리고 1963년부터 10년간 미국 뉴욕에 정착하며 세상을 떠나기 전까지 작업에만 몰두했다. 서양화지만 화폭에 우리 강산과 섬마을의 푸른 하늘, 달항아리, 매화 등 고국산천을 그리워하는 마음과 민족의 얼이 담기지 않은 곳이 없다.

지난 21일 대구미술관에서 사전 공개된 '김환기 기획전' 전시장 내부 전경/사진=배영윤 기자

전시장은 △PART 1. 시대별 조형세계(2전시실) △PART 2 아카이브(3전시실) 등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눴다. 시대별 조형세계는 △일본 동경 시대(1933-1937)와 서울 시대(1937-1956) △파리 시대(1956―1959)와 서울 시대(1959-1963) △뉴욕시대(1963-1974) 세 시기로 구분해 유화, 드로잉, 과슈(Gouache, 불투명수채) 작품 등 시간순으로 평면작품 108점을 배치했다.

대구미술관 2층 제2, 3전시실 입구에 거대한 김환기의 사진이 관람객을 맞는다. 높은 천장, 넓은 전시 공간은 김환기의 40여 년 예술 여정을 천천히 곱씹으며 따라가기에 안성맞춤이다.

집, 1936, Oil on Canvas, 22x27cm ⓒ Whanki Foundation·Whanki Museum/사진제공=대구미술관

김환기 구상 작품 중 경매 최고가(39억3000만원)를 기록한 '항아리와 시'가 전시된 모습. 그림 속에 서정주의 시 '기도'가 적혀있다./사진=배영윤 기자

첫 작품 '집'(1936)은 일본에서 서양미술을 익히던 시절 그린 것으로 이번 전시 중 유일한 일본 시절 그림이다. 작은 화폭에 계단, 나무 창살로 이뤄진 문, 항아리 등 한국적인 정서를 추상적으로 표현했다.

서울시대 작품들은 김용준 등 문인들과 교류하면서 한국 정체성과 고유의 미를 작품에 투영시키려 했던 작가의 노력이 고스란히 느껴진다. 이 섹션에서 눈길을 사로잡는 작품은 '항아리와 시'(1954)다. 매화가 꽂힌 항아리 그림 옆에 서정주의 시 '기도'를 적었다. 당대 최고의 화백과 문인이 만난 작품인 셈이다. 지난 3월 서울옥션 홍콩경매에서 김환기 구상 작품 중 최고가(39억3000만원)를 기록해 화제가 됐다.

영원의 노래, 1957,Oil on Canvas, 162x130cm ⓒ Whanki Foundation·Whanki Museum/사진제공=대구미술관

섬의 달밤, 1959, Oil on Canvas, 95x146cm ⓒ Whanki Foundation·Whanki Museum/사진제공=대구미술관

파리시대 작품들에서도 우리 민족 고유의 정서를 담은 자연 소재와 색채를 이어갔다. 삼성미술관 리움의 소장품인 '영원한 노래'(1957)는 단골로 등장하는 항아리를 비롯해 영원을 의미하는 십장생, 매화 등 그가 사랑하는 대상들을 한 폭에 담은 반추상 작품이다. '섬의 달밤'(1959)은 작가의 고향 기좌도를 표현했다. 이 시기 김환기는 산, 달, 구름 등 한국의 자연을 푸른빛으로 간결하게 그렸다. 1963년 상파울로비엔날레에 3점을 출품해 명예상을 수상한 작품이다. 국제무대에 우리 고유의 것을 알리고자 했던 작가의 정신을 읽을 수 있다.

이번 전시의 가장 많은 작품(73점)으로 구성된 시기는 뉴욕시대 섹션. '최고가 작품'이 탄생하기까지 멀리 이국에서 뼈를 깎는 노력과 연구를 거듭한 행보가 느껴진다. 김환기는 상파울로비엔날레에서 고국으로 돌아오지 않고 미국으로 넘어갔다. 언제나 새로운 도전과 모험을 두려워하지 않았던 그가 세계 미술의 중심지에서 새로운 자극을 받고 자신만의 작품 세계를 만들어가고자 했던 의지는 50세가 넘은 나이에도 꺼지지 않았던 것.

뉴욕시대 초창기 열악한 상황 속에서도 그림을 향한 열정은 신문과 잡지 위에 그린 작품들을 통해 짐작해볼 수 있다. 그 밖에 종이 위에 펜과 색연필, 과슈 등으로 그린 스케치 작품들은 대형 점화가 탄생하기까지의 고민과 연구의 흔적을 여실히 보여준다.

전시의 절정은 가장 마지막 별도 전시 공간에 있는 푸른 전면점화 작품 5점이다. 유화물감을 사용했지만 캔버스가 아닌 광목천 위에 그려 수묵화의 스밈과 번짐, 농담의 조절, 겹침의 기법 등 동양적 기풍이 풍긴다. 이곳에 전시된 '10-VIII-70 #185'는 1970년 제1회 한국미술대상전에서 대상을 받은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의 연작 중 하나로, 최대 규모 작품이다.

같은 공간에 전시된 '듀엣 22-IV-74 #331'은 뇌출혈로 세상을 떠난 해에 그린 작품. 이전 작품에서 사용하던 푸른색보다 어두운 푸른색을 사용한 것이 눈길을 끈다. 이 공간 입구에 전시된 붉은색 점화 '1-VⅡ-71 #207'은 이번 전시를 통해 일반에 최초로 공개됐다.

10-VIII-70 #185, 어디서무엇이되어다시만나랴 연작, 1970, Oil on Cotton, 292x216cm(왼쪽). 듀엣, 22-IV-74 #331, 1974, Oil on Cotton, 178x127cmⓒ Whanki Foundation·Whanki Museum/사진제공=대구미술관

이번 전시는 작품 가격만 따져봐도 1000억 원을 호가하는 대규모 전시다. 최승훈 대구미술관장은 "김환기 화백은 우리 미술의 새로운 시도를 위해 평생을 몰두했던 작가"라며 "환기미술관과 유관기관, 개인 소장가 등 많은 분이 한마음으로 자료를 제공해 예산 3억 원으로도 작가의 면면을 알 수 있는 대규모 전시를 열 수 있었다"고 말했다.

이번 전시를 기획한 유은경 대구미술관 학예연구사는 "서구 학풍을 습득하고서도 우리의 고유성과 정체성을 찾고자 항아리, 매화, 산, 달 등 '한국'을 계속 그린 화가"라며 "최고의 정수를 보여주는 점화작품 역시 자연에 근간을 두고 있고, 고향에 두고 온 친구들과 자식을 그리워했던 향수를 압축된 점들로 표현했다"고 설명했다. 유 학예연구사는 "작가가 평생 담고자 했던 우리 민족의 정체성을 관람객이 가슴 속으로 느꼈으면 좋겠다"고 덧붙였다.

김환기 연표, 그가 사용했던 화구를 비롯해 도록, 서적, 사진 등 100여 점의 아카이브 전시 관람도 빼놓을 수 없다. 제2, 3전시실 중간에 마련된 영상룸에서 상영되는 다큐멘터리 등도 김환기의 작품 세계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된다. 전시는 22일부터 오는 8월 19일까지. 입장료는 1000원.

대구미술관 '김환기 기획전' 아카이브 전시실(위, 왼쪽 아래)과 다큐멘터리 영상룸 전경./사진=배영윤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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