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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eople'간송미술 36:회화' 낸 백인산 간송미술관 연구실장

2015.01.03

[머니투데이] 김고금평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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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7월 최완수(現 한국민족미술연구소장)씨 후임으로 간송미술관 연구실장을 맡은 백인산씨. 그는 올해 초부터 간송미술관의 유물을 세상 밖과 좀 더 넓게 소통하기위해 동대문디자인플라자(DDP)로 옮겨 전시회를 계속 열고 있다. 최근엔 '간송미술36:회화'란 책도 펴냈다. /사진=이기범 기자 leekb@

한국 미술계에서 ‘간송’(澗松)이 주는 의미가 무엇인지 알기에, 백인산(47) 간송미술관 연구실장을 만나러 가는 길은 부담이 적지 않았다. 마치 고행을 업보로 삼는 수도승을 알현하는 느낌이랄까.

수십년간 학문에 정진해온 사학의 열정, 대중성에 영합하지 않고 예술의 역사성을 중시하는 학자적 태도, 자본보다 가치을 역설하는 선비의 정신이 ‘간송’이란 두 글자에 오롯이 파묻혀있기 때문이다.

백 실장은 2013년 7월 최완수(현재 한국민족미술연구소장) 후임으로 연구실장 자리를 맡았다. 40여년간 이 자리를 꿰차고 있던 최 실장의 그림자로 살았던 변방에서 미술관의 앞날을 그리는 주체로 우뚝 선 것이다.

“그렇다고 별로 달라진 건 없어요. 간송미술관은 간송 전형필, 가헌 최완수, 제가 삼위일체처럼 한 덩어리로 지켜온 나름의 신념이 일치했다고 볼 수 있어요. 그냥 문화재를 많이 모은다는 원칙보다 우리 역사와 문화를 지키겠다는 문화보국의 의지가 더 컸으니까요.”

그가 연구실장에 오르면서 우연의 일치처럼 미술관의 면모가 조금씩 달라졌다. 그해 8월 우리나라 고미술의 보존과 연구를 위해 간송미술문화재단이 만들어졌고, 올해 초부터 동대문디자인플라자(DDP)에선 ‘간송문화전’(총 3부)을 통해 외연도 넓혔다.

백 실장은 최근 ‘간송미술36:회화’란 책도 냈다. 1년에 딱 두 번의 짧은 전시로 관람객의 원성(?)을 들어야했던 ‘신비의 미술관’이 점점 세상 밖과 소통의 끈을 확장하기 시작한 것이다.

“사실 세상 뒤에 숨은 적도 없어요. 전시만 무려 87번을 했으니까요. 다만 성북동에 있을 때 공간이 좁은 하드웨어적인 부분의 결핍을 DDP를 통해 해소한 것이고, 갈수록 전시에 대한 수요가 많아지면서 불특정 다수와 소통하기위해 책도 낸 거예요.”

책을 낼 땐 고민이 컸다. 논문을 통해 한국의 고미술을 보존하고 연구하는 학자로서의 태도를 계속 견지할 것인가, 대중서를 통해 더 많은 사람들에게 우리 미술의 위대함을 제대로 알릴 것인가. 연구실장 직을 맡으면서 선택은 점점 후자로 기울어졌다.

“제 위치가 현재 연구자보다 전달자로서의 역할을 더 많이 요구받기 때문에 대중과의 소통이 중요한 임무가 됐어요. 간송미술관의 전통은 전시를 위한 공부가 아니라 공부를 위한 전시였거든요. 간송미술관의 전시가 짧은 이유도 공부가 덜 되면 전시를 열 수 없기 때문이에요. 하지만 대중들이 전통문화에 대한 관심이 많다는 걸 발견한 뒤론 ‘대중으로부터의 공감’이 중요한 화두가 됐어요.”

그가 쓴 책은 조선시대 그림 36점을 다룬다. 신사임당의 ‘포도’에서 조선 최후의 문인화가 민영익의 ‘석죽’까지 그가 녹인 글과 그림을 포개 읽으면 우리 민족의 예술혼이 이토록 위대한 것인가를 회의적(?)인 시각으로 되물을 정도다.

백인산 간송미술관 연구실장. /사진=이기범 기자 leekb@

“조선사는 지금까지도 왜곡되고 폄하되는 경우가 많았어요. 조선 시대 자체에 대한 경시 풍조가 일제시대나 지금이나 크게 다르지 않죠. 조선시대 문화의 저력을 보여주는 것이 그림과 글씨예요. 그 중 정선의 그림과 김정희의 글씨는 조선의 문화를 알려주는 상징일뿐 아니라, 동아시아를 뛰어넘는 작품세계와 독자성을 갖고 있어요. 두 사람 모두 동아시아 학자 중 최고의 학자라는 평가도 많았죠. 책에서 우리 민족의 위대함을 다시 발견했으면 하는 바람이 간절하기도 해요.”

서울 대부호 집안에서 태어난 간송 전형필(1906~1962)은 평생 문화재를 수집했다. 1930년대부터 우리나라 문화재라면 돈이 얼마가 들든 가리지 않고 사들였다. 훈민정음을 보유하고 있는 사람에게 당시 기와집 한 채 값인 1000원에 10배에 해당하는 1만원을 주고 사 ‘훈민정음’의 정당한 가치를 보존하려했고, 일본 거상으로부터 고려 최고 상감청자인 ‘청자상감운학문매병’도 거금 2만원을 들여 구입했다.

그렇게 간송은 가진 돈 전부를 문화재 구입에 썼다. 하지만 광복 이후 간송은 문화재를 모으지 않았다. 해방 후의 문화재는 해외로 빠져나가지 않을 거라는 기대때문이었다. 그가 58세에 급성신우염으로 사망하기 전까지 간송의 금전적 지원을 받지 않은 예술인은 거의 없었다.

“저도 최근에 안 사실을 처음 밝히는 건데, 간송이 돌아가시고 나서 빚쟁이들이 우르르 몰려왔었다고 해요. 이미 돈을 다 써버린 간송이 생전에 자기만 바라보고 예술활동을 하던 예술인과 단체를 그냥 두고 볼 수 없어 빚까지 내 도와준 사실을 아무도 모르고 있었던 거예요. 사채업자들이 ‘간송’이란 이름 하나만 보고 빚을 내 준거니까. 빚은 결국 (지금의) 종로4가 광장시장 맞은편에 위치한 집을 팔아 해결했어요.”

부호의 재산은 사라졌지만, 그 가치와 정신은 온전히 살아숨쉰다. 40년간 간송의 뜻을 이어받아 한국 문화재의 우수성을 알린 최완수 소장, 그리고 최 소장의 뜻을 25년간 가슴에 품으며 문화보국의 가능성을 실현시키려는 백인산 실장. 백 실장은 “간송미술관이 지닌 본연의 가치와 전시의 목적인 대중성을 잘 접목하는게 가장 큰 숙제”라며 “그 둘을 잘 수행하라고 내게 임무를 맡기신 것 같다”고 했다.

"빚까지 얻은 '간송'…그 뜻 받들어 우리 문화 위대함 전파"이미지 크게보기
현재 DDP에선 2014년 3월 1부, 7월 2부에 이어 ‘간송문화전’ 3부가 열리고 있다.(5월10일까지) 단원 김홍도, 겸재 정선 등 조선시대 대표 화가들의 진경산수화를 골고루 맛볼 수 있다.

백 실장은 “전시와 책에서 소개하는 간송미술관의 그림들은 조선시대의 문화와 예술, 삶과 정신을 이야기하는데 가장 적합한 소재라고 생각했다”면서 “우리가 ‘한(恨)의 역사’가 아닌 ‘해학과 위대함의 역사’로 살아왔다는 사실을 잊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백인산 간송미술관 연구실장=서강대 사학과를 졸업하고 동국대 대학원에서 미술로 석·박사 학위를 받았다. 1991년 간송미술관에 들어간 뒤 최완수 당시 연구실장 옆에서 그림자 역할을 하며 조선시대 문화 전반을 폭넓게 연구해왔다. 지난해 7월 최 소장의 후임으로 연구실장을 맡으면서 간송미술관의 소장 유물을 책과 전시를 통해 대외적으로 알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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