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로가기 메뉴
컨텐츠바로가기
주메뉴바로가기
하단메뉴바로가기
외부링크용로고

Trouble낙서냐 예술이냐…논란 불 지핀 '베를린 장벽 그라피티'

2018.06.18

[뉴시스] 심동준

  • 페이스북
  • 구글플러스
  • Pinterest

【서울=뉴시스】추상철 기자 = 독일 베를린시가 통일을 염원하는 의미에서 서울시에 기증한 베를린 장벽이 그라피티로 인해 훼손됐다. 2018.06.11. [email protected]

2005년 독일서 기증한 장벽에 온통 스프레이칠과 그림
그라피티, 과거 '낙서'로만 인식되다 현대미술 자리매김
"현행법 위반과 별개로 일상의 예술로서 중요한 장르"
베를린 현지에도 잔존 장벽 이용한 그라피티 공간 있어
그라피티 통해 건물에 새롭게 시대적 가치 생성되기도
"예술적 일탈 놓고 나라마다 다른 사회적 인식차 존재"

그라피티 작가인 정태용(28·필명 히드아이즈)씨가 서울 중구 청계천에 전시된 베를린 장벽에 스프레이로 그림을 그린 행위를 놓고 세간의 비판이 상당하다.

주로 정씨가 역사적 유물인 베를린 장벽을 스프레이 칠로 '훼손'했다는 관점에서 접근하는 경우가 많다. 이는 그라피티를 무허가 물건 훼손 행위로 보는 국내법의 시각과 큰 틀에서 궤를 같이하는 시선이다.

17일 경찰에 따르면 그는 지난 6일 오후 11시30분께 청계천 베를린장벽에 그림을 그렸다. 서독 쪽 벽면에는 분홍, 파랑, 노랑 등을 칠했고, 동독 쪽에는 '날 비추는 새로운 빛을 보았습니다. 내 눈을 반짝여줄 빛인지' 등의 글귀를 써넣었다.

수사기관은 대체로 타인 건물에 허락 없이 그라피티를 하는 경우 재물손괴와 건조물침입죄 등에 해당할 수 있다고 본다. 정씨에게는 공용건물손상 혐의가 적용된 상태다. 서울 중구청이 장벽 일부를 지난 2005년 독일 베를린시에서 기증받아 관리해왔음을 반영한 것이다.

그라피티는 주로 벽면에 ▲스프레이 ▲스티커 ▲소형 타일 ▲벽보 ▲구조물 ▲빛 등을 이용해 캐릭터나 글자, 상징적 문구 따위를 그려낸 것을 말한다. 유사 이전 암각화 등도 그라피티의 일종이라고 보는 견해가 있으며, 이후 상당 기간 예술이라기보다는 벽을 망치는 '낙서'에 가깝게 인식돼왔다.

하지만 그라피티는 2차 세계대전 이후 낙서화에 대한 연구가 이뤄지고 다양성과 해체를 강조하는 미술사조의 발전과 스프레이 페인트 등 도구 개발 등이 맞물리면서 문화 현상의 하나처럼 됐다. 처음에는 아무 곳에나 그려져 도시 문제로 여겨졌으나, 예술로 바라보는 시선이 늘면서 점차 현대미술의 한 부류로 자리매김하게 됐다.

그라피티를 바라보는 시선은 양분돼 있다. 이미 유명세를 얻었거나 예술 기관 또는 정부로부터 지원을 받는 작가들의 그라피티는 보존해야 할 예술품 개념으로 접근하는 경우가 일반적이다. 반면 그렇지 못한 다수 그라피티 작가들의 행위는 기물 파손이나 미관 훼손 등 사회적 문제를 일으킨 것으로 여겨져 경범죄 등으로 처벌 받는 일이 적지 않다.

진휘연 한국예술종합학교 미술원 교수는 "그라피티는 활동하는 작가의 역량이나 평가에 따라 많이 다르다. 특정 작가는 상당히 유명하고 여러 군데에서 대규모 작업을 하는 일이 있지만, 이름이 상대적으로 많이 알려져 있지 않은 작가의 경우에는 여러 제약을 받는 경우가 많다"라고 전했다.

【서울=뉴시스】추상철 기자 = 독일 베를린시가 통일을 염원하는 의미에서 서울시에 기증한 서울 중구 청계천 인근 베를린 장벽이 그라피티로 인해 훼손돼 있다. 2018.06.11. [email protected]

전문가들 사이에서는 이번 베를린 장벽 훼손 논란을 보다 폭넓게 바라볼 필요가 있다고 보는 시선이 있다. 정씨가 현행법을 위반한 것에 대한 비판과는 별개로, 대상이 시대적 가치가 있는 유물이라고 해서 그라피티 자체의 예술성을 완전히 부정하는 건 오히려 시대착오적일 수 있다는 관점이다.

최병식 경희대 미술대학 교수는 "그라피티는 낙서에서 시작했지만, '일상의 예술'이라는 개념 아래 이제는 미술사적으로 하나의 중요한 장르로 인정되는 추세다"라며 "브란덴부르크에 있는 장벽을 비롯해 뉴욕 지하철 등 많은 곳에 그라피티가 있다. 이런 것들은 예술이라는 개념을 포함하고 있는 것으로 봐야 할 것이다"라고 설명했다.

정씨는 베를린 장벽에 했던 행위가 '예술'에 해당한다는 취지로 주장한 것으로 전해진다. 단순한 낙서가 아닌 남북 평화라는 의미를 담은 작품이었다는 것이다. 경찰 조사에서 그는 "유럽 여행 때 베를린 장벽에 아티스트들이 예술적 표현을 해 놓은 것을 봤다"라며 "한국에서는 사람들이 장벽에 관심도 없고 흉물처럼 보여 건곤감리 태극마크로 평화와 자유를 표현했다"라고 진술했다.

정씨 주장대로 실제 베를린 장벽을 그라피티 전시 공간으로 활용한 사례가 없지 않다. 베를린에 위치한 이스트사이드 갤러리가 대표적이다. 이 전시 공간은 미철거 장벽 남서쪽 구역에 벽화 공간을 구현하는 방식으로 조성된 것으로, 베를린 장벽의 시대적 의미를 그라피티가 더욱 시각적으로 보여주는 것으로 평가 받는다.

잔존 장벽 일부인 벽화 공간에는 지난 1990년 각국 예술가들이 베를린 변화에 관한 상징 또는 느낌을 표현했다. 러시아 작가 드미트리 브루벨(Dmitry Vrubel)이 그린 벽화 '형제의 키스' 등이 유명하다.

나아가 일반적인 건물이 그라피티가 그려짐으로 인해 시대적 가치를 얻게 된 경우도 있다. 미국 뉴욕 퀸즈에 있던 '5Pointz'는 1990년대부터 그라피티의 메카로 불릴 정도로 벽화가 가득한 명소였다.

벽화들은 허가를 받고 그려졌으나, 이후 건물주가 고급아파트 단지 신축을 추진하면서 2013년 11월 외벽에 흰색 페인트가 칠해졌으며 2014년 건물도 철거됐다. 작가들은 유실된 그라피티 작품에 대한 문제를 제기, 연방법원은 지난 2월 건물주가 철거 통보 요건을 지키지 않는 등 작가들의 권리를 충분히 보장하지 않았음을 근거로 작품 당 15만 달러를 배상할 것을 판결했다고 한다.

【서울=뉴시스】심동준 기자 = 지난 13일 그라피티 작가인 정태용(28·필명 히드아이즈)씨가 사회관계망서비스(SNS) 계정에 게시한 사과글. 경찰에 따르면 그는 지난 6일 오후 11시30분께 청계천 베를린장벽 서독 쪽 벽면에 분홍, 파랑, 노랑 등을 칠했고, 동독 쪽에 '날 비추는 새로운 빛을 보았습니다. 내 눈을 반짝여줄 빛인지' 등의 글귀를 써넣었다. 2018.06.15 (사진 = 인스타그램 갈무리) [email protected]

최 교수는 "그라피티는 현실에 대한 일탈이나 반항이 강한 성격을 띤다. 미국이나 유럽의 그라피티 작가들은 그만큼 자유로움을 중요하게 생각한다. 현재까지 우리나라에서는 그런 부분들이 일상화되지는 않았다고 본다"라며 "멀쩡한 벽에 그라피티를 하는 것은 당연히 규제돼야 할 것이다. 다만 예술적 일탈에 대한 사회적 인식 차이도 존재하고 있다"라고 지적했다.

정씨는 비판 여론이 거세진 뒤인 지난 13일 본인의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 "장벽 자체에 돈으로 환산할 수 없는 가치가 있는 많은 상징성들이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라며 "그 상징성 부여만으로 충분했는데 이와 같은 행위를 함으로써 여러분께 심려를 끼쳐 죄송하다"라는 내용의 사과문을 게시했다.

그는 "제 의도는 불순하지 않다. 11년 만에 이뤄진 회담을 영감으로 분단 현실에서 더 많은 자유를 상징하고픈 마음이 표현된 것"이라며 "의도를 떠나서 죄송하다는 말씀을 드리며, 그라피티에 대한 안 좋은 인상을 안겨 드려 죄송하다"라고 적었다.

서울 남대문경찰서는 정씨에 대한 조사를 이어가면서 구속영장 신청 여부를 검토하고 있다.

[email protected]

최상단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