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8- )
홍소안의 그림을 보고 있으면 솔향기와 황토내음이 물씬 풍긴다. 호젓한 산 중턱의 외로운 소나무, 사방으로 가지가 뻗어나간 거대한 뒤틀린 노송(老松)은 넓은 화면 전체를 채우고 있으며 설백(雪白)의 물은 한국적 서정을 자아낸다. 흠잡을 데가 없으니 그저 좋은 작품이라고 칭찬할 수 밖에 없다.
홍소안의 그림은 2000년대 들어 그 어떤 서양적 체취가 배어 있는 것으로 느껴졌다. 그 서양적 체취, 그것은 반드시 화법과 재료 등에서 오는 것은 아니다. 그의 작품성향은 오히려 한국화도 아니요. 그렇다고 서양화도, 서양화에 근접한 작품으로 분류되었으나 이는 그가 사용한 회화재료가 광목천과 아크릴 등을 사용하고 있다는 이유일 것이다. 그러나 오늘날 재료자체가 어떤 특정 장르를 규정 짓는 것은 아니다. 작가가 말하듯 그의 뿌리는 한국화였던 이유로 그의 작품은 화법과 재료와 달리, 한국화의 선을 강조하고 있으니 말이다.
그의 작품은 재료뿐 아니라 기법에서도 서양화를 많이 닮아있다. 인상파의 그림을 보는 듯한 착각마저 일으킨다. 그의 작업은 화선지보다 질긴 광목천에 접착성이 강한 안료를 바른 뒤 마르면 마구 구겨서 화면을 마치 소나무 껍질처럼 온통 부르트고 갈라지게 만들어 그 위에 사물을 표현한다. 사물의 한복판에 노송(老松)을 나신(裸身)으로 클로즈업시켜 서양에서 쓰는 점묘법을 닮은 듯한 그의 채색방법은 대상이된 자연의 핵심을 축약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또 하나 그의 독창성은 조선후기 인물화에서 잠시 이용되던 채색법으로, 그림 뒷면에 먹이나 안료를 발라 균열이 있는 틈새로 스며들게 하는 배채(背彩) 기법을 사용했다는 점이다. 단순한 붓질로는 표현 할 수 없는 살아 쉼쉬는 생동감을 화폭에 불어 넣기 위함이다.
먹과 수성안료, 아크릴을 혼합해 나이프로 작업한다. 이는 서양화법이다. 기존 한국화에서 볼 수 없는 기법으로 순수 한국화에서 보면 그의 황토빛 삶만큼이나 이단적 행동이다.
그의 작품은 모두 소나무실경(實景)이다. 작가는 그저 풍경의 대상이 아닌 대자연과 하나된 소나무와 일체감이 들 때까지 숙고하다가 노송(老松)의 나신(裸身)을 탄생시킨다. 선과 여백으로 표현되는 한국화의 본질위에 먹의 묘용과 붓의 감응을 터득, 자신만의 세계를 소나무에 정립시킨 것이다.
섬세한 소나무 묘사는 자연에 대한 본능적 반응이다. 예리한 칼날의 내뻗침과도 같이 뽀족하게 뻗어나간 나무의 줄기들은 실처럼 가느다란 기운이 넘치는 선으로 강조하였다. 한국화에 바탕을 둔 사물의 정확한 관찰은 어쩌면 그의 혈관에 흐르는 삶의 무게 때문인지도 모른다.
홍소안 특유의 마티에르 효과는 우리나라 산야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소나무의 질감과 유사하여 한국인의 정서에 깊이 와 닿는다. 작품는 한국화에서 보기힘든 고도의 테크닉으로 보는 이로 하여금 서양화로 현혹시키기도 한다.
그러나 그의 작품을 10여년을 지켜보면서 그의 화려한 테크닉은 그의 실험적 사고에서 파생된 표현의 다양성과 반복된 실험의 결과로 빈틈없이 계산된 구도에서 검은색의 먹물과 단색의 물감을 많이 혹은 적게 찍어서 겹겹이 바른 뒤 마구 구겨 여러 층의 농담변화와 다양한 필치는 홍소안의 섬세한 감각과 기법의 완벽성을 감지할 수 있으며 캔버스가 아닌 닥종이를 연상케한 시각적 재질로 한국화의 한 장르를 개척했다 할 수 있다.
수묵화가 아닌 그것도 동양의 채색법을 쓰지 않음에도 아크릴물감이 낼 수 있는 다양한 효과의 가능성을 최대로 이용하여 나뭇가지, 수풀, 언덕 하늘, 그리고 흙으로 노출된 뿌리 등 자연의 특성을 감탄 할 만큼 잘 표현 하였다. 이는 그가 그린 작품들이 그의 감성과 사유로 재창조된 결과라 생각된다. 배경의 공간도 전통한국화의 흰 공간이 아닌 어렴풋이 나타나는 깊은 숲속의 느낌을 주고 있다.
그의 계속적인 실험정신은 우리에게 자유로운 그의 감성과 사유로 재창조하고 채색된 우리네 삶의 풍경을 결코 강요하지 않으면서 그만의 자연, 그만의 세계에 빠지게 하고 있다.
조계연(송암재단 송암미술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