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로가기 메뉴
컨텐츠바로가기
주메뉴바로가기
하단메뉴바로가기
외부링크용로고

전시소식[스페이스 캔] 아, 禽獸강산, The Beautiful Scenery of Beasts

2018.08.21

Writer : news
  • 페이스북


 

 

 

아, 禽獸강산, The Beautiful Scenery of Beasts

이재훈展 / LEEJAEHOON / 李哉勳 / painting

2018_0816 ▶︎ 2018_0831 / 일,공휴일 휴관

 

 

스페이스 캔

Space CAN

서울 성북구 선잠로2길 14-4

(성북동 46-26번지)

Tel. +82.(0)2.766.7660

www.can-foundation.org

 

 

아, 금수강산(禽獸江山)-금수강산(禽獸江山)을 여유(旅遊)하다. ● 흔히 사람들은 자신들이 살고 있는 시대가 가장 힘겹고 고통스럽다 말한다. 인간의 삶속 고통은 정량화할 수 없고, 사람들은 역사로부터 얻을 수 있는 교훈을 손쉽게 망각한다. 그저 내 눈앞의 상황이 가장 자신의 피부로 직면하기에, 지금의 현실은 우리의 사고와 감각을 지배하기 마련이며, 과거의 기억은 유리된 채 박제되거나 소산되어 잊힌다. 몇 번의 과오를 교훈삼아 과거의 역사기록을 들쳐보며 놀라게 된다. 우리는 항상 똑같은 실수와 잘못을 반복하고 있다는 것에.

 

018년 스페이스 캔에서 개최되는 이재훈 개인전 『아, 금수강산(禽獸江山)』은 "우리가 살고 있는 비가시적이며 추상적인 사회를 과연 어떻게 이해하고 인식하고 있는가? 그리고 이러한 인식으로부터 사회를 어떻게 시각화 할 수 있을까?" 라는 의문에서 출발한다. 미국의 지리학자 '이푸 투안(Yi-fu Tuan)'은 그의 저서 『공간과 장소』를 통해, "공간(space)이란 그 자체로 단지 물리적인 영역을 가리키는 것에 불과하지만, 공간이 가치와 경험을 갖게 되는 순간 그 곳은 장소(place)가 되어 사람의 일상을 바꿔놓는다."라는 개념을 역설한다. 이에 작가는 '사회'라는 거대하고 추상적인 개념에 공간과 장소라는 개념을 적용한다. ● 작가는 이번 전시의 기획에 있어 '정원(庭園, Gardening)'이라는 가시적 메타포를 전격적으로 기용한다. 이는 사회적 현상과 제도에 대한 인식을 풍경과 정물로 시각화함으로써, 사회를 하나의 물리적 '공간'이 아닌 가치와 경험의 '장소'로 변화시키고자 함이다. 정원은 대개 울타리와 그 울타리가 에워싸여진 공간에 구성되는 무엇들을 말한다. 그리고 정원을 가꾸는 이들에게 있어 그 구성원리는 하나의 작은 세계이자 우주이다. 일본의 정원양식의 하나인 '가레산스이(枯山水, 마른산수)'처럼, 동양정신세계를 표상하는 '산수(山水)'가 동양의 정원에서는 주된 콘텐츠가 되는 것처럼 말이다.

 

이는 마치 우리가 사는 사회를 연상하게 한다. 사고를 더욱 확장하여 되짚어본다면 정원은 인간문명을 형성과 함께한 도시의 구조와 유사하며 작동원리 또한 공통점을 발견할 수도 있다. 일반적으로 정원이란 인공적으로 만들어진 유기적 구조의 클러스터들이 모인 형태로, 군락생활을 하는 인간사회와 다를 바 없다. 다시 정리하여 말한다면, 작가는 비가시적인 추상적 개념의 형태인 '사회'를 '정원'이란 물리적 공간으로 전유(Appropriation)하고 있다. 또한 '사회'와 '정원'은 상반된 특성을 지니고 있다고 보고, 상반된 지점을 꼬집어내어 개념을 정리한 후, 이른바 '제명행위(題銘行爲: 명승지에 자신의 감상과 이름을 바위에 글씨를 새기는 행위)'를 통해 경험적 장소로 치환한다. ● 작가는 사실, 지금까지의 작업세계에서 '제명행위'로써 갖가지 사회적 문제에 대한 본인의 의식을 지속적으로 표명해왔다. 지난 2017년, 아트사이드 갤러리에서 개최된 『초원의 결투를 위해』展에서 공간을 압도하는 탑 조형물로써 기념비적 '제명행위'의 정점을 보여주었다면, 이번 『아, 금수강산(禽獸江山)』展에서는 동양적 관념이 내포된 '풍경적 정원'의 방식으로써, 하나의 장소로 전이된 '제명행위'를 선보인다.

 

스페이스 캔 1층 공간에는 일종의 '마른산수'의 개념으로 전시되는 설치작품들이 있다. 앞서 언급하였듯, 단순히 마치 조악한 산수정원처럼 '흉내낸 자연, 혹은 모형화 된 자연'의 형태가 아닌 '제명행위'가 부여된 하나의 경험적 장소로서 작용한다. '모형'되어진 바위와, 기둥, 보도블록 등은 마치 화석화(化石化)된 듯, 박제된 자연의 행색을 보여준다. 이것은 다분히 고달프고 처연하기 그지없다. 작가가 말하는 '사회'처럼, 아슬아슬하게 서로를 의지하고 있는 설치작품에 살짝이라도 손을 댄다면, 즉시 와르르 와해될지도 모르는 구조가 보는 이로 하여금 가슴을 졸이게 할 것이다. 무언가 그럴듯하게 번영하는 도시에서 각박하고 숨 가쁜 나날을 보내는 대한민국의 시민이, 잠시나마 자신의 신체를 유체 이탈하여 전지적 작가시점으로 자신을 포함한 사회전체를 바라보게 된다면? 그 위태로운 사회에 대한 불안감을 애써 감춰낼 수 있을 이는 또한 얼마나 있을까?

 

누구나 정원을 소유할 수 있지만, 자신만의 가치가 투영된 '장소'로서의 '정원'으로 가꾸어 나가는 일은 꽤나 어려운 일이다. 초보자들은 정원의 형태를 유지하는 것만으로도 벅찬 작업이며, 눈에 보이지 않는 법칙과 질서를 파악하는 데에도 꽤나 많은 시간이 소요된다. 그러한 접근에서 사회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인간이 사회를 하나의 장소로서, 어떠한 방식을 빌려 의미를 부여하고 조직해야 하는가? 더욱이 한국사회처럼 경쟁이 극심하고 모든 것들이 급격한 변화를 겪을 수밖에 없는 공간에서, 일방으로 경도되지 않는 가치중립성을 견지하는 '장소'로서의 사회 구현은 과연 가능할까? 이러한 의구심을 떨쳐내는 것은 자못 쉽지 않는 일이다. 하지만, 작가의 변화된 작업태도에서 의미 있는 해결의 실마리를 찾아내는 것도 불가능한 일이 아닐 것이다. ■ 신시호​ 

 

 

 

최상단으로